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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 히스토리] 향수의 발자취와 여인들
[뷰티 히스토리] 향수의 발자취와 여인들
  • 박가희 기자
  • 승인 2018.05.29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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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제공]
[사진= 픽사베이 제공]

향과 인간의 만남은 기원전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역사의 시작은 그것보다 훨씬 이후인 14세기 후반 아라비아에서 발명된 알코올의 제법이 유럽에 보급되면서라고 전해진다.

향수를 ‘퍼퓸(Perfume)’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라틴어인 ‘퍼퓨뭄(Perfumum)’으로 ‘연기를 통하여 태운다’라는 의미로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향기 나는 물질을 태웠던 것에서 유래된다.

1370년 경 ‘헝가리 워터’라는 이름의 ‘오 드 뚜왈렛’ 풍의 향수가 출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사용하는 알코올성 향수의 원조이다. 이 향수는 당시 헝가리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그녀가 뿌린 향수 냄새를 맡은 이웃나라 폴란드 왕이 70세가 넘은 여왕을 연모하여 결혼을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이 향수가 세상에 등장하자 4세기에 걸쳐 유럽 각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탐험가로 알려져 있는 마르코 폴로,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도 사실 당시의 여왕 또는 왕으로부터 명을 받고서 향료와 향신료의 산지를 찾고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탐험을 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양의 향료나 향신료 산지와 거래 루트를 열어 16~17세기에 걸쳐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된다.

이 두 나라는 탐험을 통해 얻은 방향성 원료를 기본으로 공업을 발전시켜 그때까지 아라비아인에게만 의존해왔던 기술을 습득해 자코(무스크), 앰버그리스, 시벳 등의 향을 유피(무두질한 가죽) 등에 묻혀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스파이스 가죽이라고 불리는 가죽 냄새이며 지금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향수의 황금시대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이태리에서 시작된다. 플로렌스에 있는 성 마리베라의 도미니카회 수도사가 1508년 향료 조제용 아틀리에를 개설하는데 여기서 만들어진 ‘유리 향수’가 인기를 얻는다. 당시 유럽의 상류 계급이 맞춤 향수를 주문하면서 향수의 오뜨 꾸뛰르가 일반화 된다.

그 후 1533년 플로렌스(Florence) 메디치(Medici)가의 까뜨린느(Catherine, 1519〜589) 공주가 프랑스 앙리(Henry) 2세와 결혼을 하는데 전속 퍼퓨머인 레나드 비앙코를 데리고 프랑스에 가게 된다.

이 레나드 비앙코는 국가의 극진한 원조를 기반으로 유명해져 파리 노트르담 사원 근처에 향수 숍을 오픈, 대성공을 거뒀다. 역사상 최고의 향수 전문점이 탄생한 것이다. 이 향수 숍의 대성공은 바로 목욕하기 싫어하고,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는 프랑스 국민성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까뜨린느는 부군인 앙리 2세의 시대 뿐 아니라, 2명의 자식인 샤를르 9세, 앙리 3세의 제위 중에도 프랑스 향료 산업을 독점 지배했다. 까뜨린느 드 메디치의 향료와 향수는 멀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까지 거의 유럽 일대로 보급된다.

향수의 제 2 황금시대로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태양왕) 시대에 들어서 향료와 향수는 산업으로서 크게 꽃피우게 된다. 당시 패션은 피혁 제품이 대부분이었는데 무두질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혁 특유의 동물 악취를 없애기 위해 향료와 향수가 소비됐던 것이다. 벨트, 장갑, 모자, 가발 등에 뿌려야 할 향료와 향수는 그 무렵의 패션에는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었다.

현재 향수의 고향으로 알려진 남 프랑스의 그라스 지방도 옛날에는 피혁 제품(특히 유피)의 생산지였다. 그래서 유피의 부가 가치를 높이기 위해 향료가 쓰인 것이 향료 생산의 내력이다.

당시 루이 14세는 ‘최고의 향기를 풍기는 제왕’이라 불렸으며 궁정에서는 매일 다른 향수를 쓰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오렌지 꽃 향수인 네롤리가 일반적으로 애용되었고 히야신스 향수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 향료/ 픽사베이 제공]
[사진= 향료/ 픽사베이 제공]

19세기 중엽에는 화학 합성 향료가 계속해서 발명되어 향수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 전까지는 천연 향료만을 사용해왔던 탓으로 향료와 향수는 상류 귀족 계급의 사치에 그쳤지만 19세기 이후로 대중화되었고 영화에까지 오 드 뚜왈렛 및 오 데 코롱이 등장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스칼렛 오하라가 레트 버틀러를 만나기 전에 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 데 코롱으로 양치질을 하는 장면은 영원한 유머로 남아 있다. 또한 서부 영화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동부까지 와서 사랑하는 클레멘타인을 위해 오 드 뚜왈렛으로 멋을 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대중화 경향 속에서 ‘근대 향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자끄 겔랑이다. 그는 ‘파란 시간’, ‘미쯔꼬’, ‘야간비행’ 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래서인지 겔랑의 향수 제품은 지금도 명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 후 파리 복식패션 디자이너들이 부유한 후견인을 설득하여 향수를 패션 디자인에 도입하기 위한 조향이 전성을 이루게 된다. 샤넬, 랑방, 장 빠뚜, 니나 리찌가 그것들이다.

그 외에 발렌시아, 발망, 피에르 가르뎅, 까르벵, 크리스찬 디오르, 자끄 홧뜨, 지방시, 마담 그레, 구찌, 거기에 입 생 로랑과 같은 새로운 디자이너가 조향사들을 배출하면서 근대 향수를 완성시켰다.

▶ 역사속 향수로 말한 여인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후 여왕이 되지만 재상 보티노스에 의해 축출되나 다시 왕궁으로 들어간후 케사르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렇다면 케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는 특별히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녀의 코는 표준보다 지나치게 높아 안토니우스의 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안심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고 화술이 뛰어나며 철학, 과학, 어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는데 결정적으로 케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향기’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만났던 배는 바닥에 꽃을 잔뜩 깔아서 그 향기가 연안까지 퍼져나갈 정도였고 미의 여신으로 단장하고 누워 있는 클레오파트라가 무척이나 고혹적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향기를 절묘하게 사용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카피’라는 조합 향료를 애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궁정의 마루에 장미를 발꿈치 정도의 높이로 깔고 향이 들어 있는 욕조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으며 그녀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에 ‘동물성 향료‘를 발랐다고 한다.

[사진= 마담 퐁파두르/ 픽사베이 제공]
[사진= 마담 퐁파두르/ 픽사베이 제공]

마담 듀바리 & 마담 퐁파두르~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두 여인은 향기에 있어서도 라이벌이었다. 18세기에 들어 장 마리 화리나란 사람이 향료를 독일의 도시인 쾰른의 물로 묽혀서 판매한 것이 유행이 되어 ‘쾰른의 물(코롱의 물)’이라는 의미의 ‘오 데 코롱’이 탄생했는데, 이것을 사교계에 널리 퍼뜨린 사람이 바로 듀바리 부인이다.

또 다른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은 ‘로코코의 여왕’ 이라고 불리며 예술계에 깊은 관심을 가져 아티스트들의 스폰서로서 잘 알려져 있다. ‘퐁파두르 풍’이라고 불렸던 많은 패션, 헤어 스타일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앞서가는 미적 센스를 지니고 있어 당시 궁정 여성들의 패션을 선도했다고 한다.

그럼 그녀의 향기에 대한 센스는 어떠했을까? 그녀는 강한 동물성 향기보다는 자연의 꽃 향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베르사이유에 그녀가 만든 정원은 꽃 향기를 즐길 수 있도록 향기 좋은 재스민, 오렌지, 장미 등이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향기로 체질 개선을 시도한 것인데 음식에 향료를 넣고 음료에도 넣어 마셔 루이 15세의 관심을 받았다. 죽기 직전에도 자신의 얼굴에 연지를 칠해 달라고 했다고 하니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리 앙뜨와네뜨~

비극의 여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리 앙뜨와네뜨는 황태자(후에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위해서 14세에 프랑스로 가게 된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쾌락만을 추구하며 지루함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풍조에 물들어간다.

당시 프랑스에는 목욕 습관이 없었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정도나 장미수 등으로 닦는 정도였다고 한다. 단지 상류 계급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욕조가 있었으나 청결에 대한 의식이 낮았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고상한 장미와 바이올렛의 향기를 좋아했으며 애용된 향수는 ‘꽃의 파멸’이라는 이름의 향수였다고 한다.

그녀는 처형되기 직전까지 하인에게 향수를 사러 보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향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여인으로 전해진다.

양귀비~

중국 역사에는 서시(西施), 비연(飛燕), 향비(香妃), 매비(梅妃), 양귀비(楊貴妃) 등 향기와 관련된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이가 양귀비일 것이다. 그녀는 당의 현종 황제와의 사랑 이야기와 시인 백낙천의 「장회가(長悔  )」에 등장한 인물로 더 유명하다. 절세 미인 양귀비는 풍만한 육체와 흰 피부를 지녔으며 조각과 같은 단정한 용모를 가졌고 가무의 명수였다고 한다.

그녀는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어서 체취가 강하고 겨드랑이 암내로 섹스 어필을 했는데 전신에 바른 무스크 향과 섞여 한층 더 관능적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는 치자, 제비꽃, 목련 등의 향을 주로 사용했으며 안녹산의 반란에 의해 37세로 생애를 마쳤을 당시 동란 중에 그녀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황제가 양귀비에게 보낸 향주머니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정미순 조향사
정미순 조향사

글_ 정미순

지앤 퍼퓸&플레이버 스쿨 원장

향수제작사 지엔 퍼퓸 대표

향수 잡지 씨센트 발행인

향수박물관 뮤제드파팡 관장

  신진조향사 양성 프로젝트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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