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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남 신안, 전세계 관광지로서 자산 충분하다
[기고] 전남 신안, 전세계 관광지로서 자산 충분하다
  • 문정원 기자
  • 승인 2019.11.15 1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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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자연경관, 노벨상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 등

기고- 베트남 ‘베한타임즈’ 김홍업 발행인

목포의 적산가옥을 뒤로하고 늦은 시간에 무안군을 거쳐 무안 신안간 연륙교를 지나 신안군에 도착했다. 

# 신안군
신안군은 바다를 포함한 넓이가 서울의 25배이고 전라남도의 땅 크기와 맞먹는다. 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으로 분리되어 오늘날 신안군으로 발전되었다. 인구는 43,169명(2016년 기준)이고 가구수는 22,249가구이다. 지금은 도시로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서다 보니 인구가 줄고 있다. UNESCO 지정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선정되어 향후 자연생태계 보존으로 태고적 자연과 더불어 힐링을 원하는 관광객들의 주요한 방문지가 될 것이다. 특히 남사르 습지(뻘) 보존지역으로 선정되어 뻘에서 분출되는 각종 신선한 공기로 건강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정신적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많이 될듯하다. 간만의 차가 10m 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안군은 간척과 유배의 섬이다. 육지와 교류가 어렵고 척박한 땅에서 간만차가 10m나 되는 자연현상을 활용해 뚝을 쌓고 그곳들을 농지로 바꿔 배고품을 해결해왔다. 흰 쌀밥을 먹기 위해 바다를 메꿔 농사를 짓는 땅으로 간척한 것이다.

그리고 높은 파도와 육지와의 접근이 어려운 여러 섬들이 많아 정치적 사변이나 지역적 생활변고에서 본의 아니게 쫒겨들어온 유배의 섬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정약용의 형)이다. 조선 중기인 1801년 신유사옥 시 천주교도 박해 시 남인과 친해 천주교 세례 받게된 연유로 유배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해양물의 생태를 관찰 연구하여 자산오보 라는 책을 집필해서 남겼다. 그렇지만 육지에서 정치적 사건에 의한 강제 유배된 유명인 들만이 아니라 가족간의 분쟁 혹은 지역 내 분규로 인해 이곳으로 건너온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이 유배된 지역으로 그 독특한(?) 재능이 후손들에게 이어져 지금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른 우리가 알 수 있는 현대의 인물이 김대중 대통령뿐만 아니라 장병준 독립운동가, 김환기 화백, 이세돌 9단, 천정배 의원, 강동희 농구선수, 홍성담 화백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후손들이 많다.

# 증도
어쨌든 우리는 번잡한 도시를 감추는 석양의 어둠과 더불어 사옥대교와 증도대교를 건너 신안 증도에 있는 엘도라도 리조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곳 엘도라도 리조트에서 숙박했다. 빌라식 콘도가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마치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방 배정 후 입실하자 마자 베란다에서 보니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해가 지는 모습이 햇빛과 어둠이 교체되는 순간의 매우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가족들과 같이 오면 밥도 해먹고 경치도 구경하고 옆에 해수욕장에서 수영도 하고……여름에 가족들과 어울려 한번 오고 싶은 경치와 편의시설이다. 수도권에서 약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단다. 그러고 보니 멋진 풍경에 서두를 필요없는 태초의 모습과 더불어 멈춰진 시간 속처럼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걷는 도시(slow city)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바쁜 도시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이 태고적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힐링하기는 최고인 것 같다.

시간 관계상 방문하지 못했지만 이 섬에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이 있다. 신안군민의 90%가 기독교를 믿게 했다니 그 노력이 대단하다. 그 비결이 뭐였을까?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발품을 열심히 팔았단다.  70여개의 유인도에 다리도 없는 시절에 발품을 팔며 여러 군민들에게 보인 정성이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군민들의 마음을 산 모양이다.

엘도라도 리조트에서 1박 하고 아침 일찍 서둘러 버스는 출발하여 천사대교에 도착했다. 

# 천사대교
국도 2호선의 교량으로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연륙교이다. 국내 최초 사장교(1공구: 대우건설-3.58km)와 현수교(2공구: 대림건설-3.64km)를 동시에 배치한 교량으로 총연장 7.2km로 2010년 9월 착공하여 2019년 4월 완공되었다. 다리 길이로만 보면 국내 최장이란다. 이 대교는 신아군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 신의도 장산도 안좌도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 9개면 섬들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펼쳐진 일명 다이아몬드 제도를 연결하는 최 단거리 육상 교통망을 완성한다. 이 다리는 시속 60 km로 제한되었고 폭은 11.5m로 2차선으로 설계되었다. 물론 넓이는 유사시 3차선도 가능하다고 한다. 금년 강원도 산불 이후 갑자기 관광객이 몰려 극심한 교통체증이 있었다 한다. 한여름 관광시즌에는 교통체증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slow city 와 힐링을 주제로 한 신안군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는 이것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기사님의 배려인지 먼저 압해도에서 암태면(내륙에서 서해안 방향)으로 건넌 후 역으로 돌아오면서 다리와 김양식장과 갯벌의 광경을 더 볼수 있었다. 그런 후 신안군 관광 해설사와 만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사진도 찍고 천사대교에 대해 설명도 듣고 나서 다시 다리를 건너 암태도의 에로스 박물관을 향했다. 

# 에로스 서각 박물관
입구에 학교연혁비가 있는데, 1949년에 개교한 암태 초등학교다. 최대 전성기인 1971년에는 12학급에 총학생수가 760명이나 되었으나 1999년 8월 31일 결국 폐교되었다. 폐교 당시 4학급에 총 학생수가 41명이었고, 개교 이래 47회의 졸업과 3,37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안군은 이 폐교를 개조하여 지금의 에로스 서각 박물관을 만들었다. 자칫 흉물로 방치될 뻔한 구조물을 잘 활용한 경우라 하겠다.이곳은 성문화관, 에로스 박물관(에로스/서각명인들의 작품 공간), 용박물관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대체 서각이 무엇일까?. 서각은 문자를 새긴다는 뜻으로 오래 전 인류삶의 각종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기본 욕구에서 시작되어 동물의 뼈, 나무, 돌, 조개껍질 등 각종 자연 재료에 표현 되면서 점차 발전하였다. 죽간이라고 대나무에 글을 써서 지금의 책처럼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 최초의 목판유산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팔만대장경", 그리고 "직지심체요절"를 들수 있겠다. 이런 서각이, 표현의 대상이 인간 본능의 고차원 감성인 에로스 세계로 향하면서 시각을 통해 그 근원의 길을 따라가서 뇌를 자극하고 거시기가 흥분하고 손이 떨리면서 나무에 사정없이 긁어대서 만든 부산물을 진열한 곳이 에로스 박물관 같다.

이 에로스 박물관의 훌륭한(?) 작품을 보면서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삶을 살아온 분들이라 점잖게 미소지으며 관람했지만, 우리가 암태 초등학생 시절에 이런 작품을 보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좀더 미소를 지으며 상상해 보니 학창시절 친구들끼리 남몰래 비디오 보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물론 체험관도 지어졌다면 더 많은 관람객들이 올 수도 있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언론인들도 있었다. 물론 몇몇 작가들의 글과 그림들이 서각작품으로 진열도 되어있다.

# 무한의 다리
우리는 은암대교를 건너 자은도 자은둔장 해변에서 구리도-고도-할미도를 잇는 무한의 다리에 도착했다. 길이 1천4m 폭2m의 보행교이다. 이 이름은 무한대를 내포하는 8월8일 섬의 날을 기념하고 섬과 섬이 다리로 연결된 연속성과 끝없는 발정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1도 1뮤지움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국 대표 조각가 박은선 작가와 스위스 출신의 건축 거장 마리오보타가 부친 이름이다. 불행히도 시간에 쫓기기도 했지만 천상 도달할 수 없는 무한대의 다리인지라 끝까지 걷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 왔다. 조용한 바다 위에 시간개념 없이 흘러가는 바닷물을 내려다보니 내 몸이 물을 뒤로하고 흘러가는 듯한 착각 속에 있었다.

은암대교를 오가다 보니 자은도에 풍력발전소의 큰 날개가 여러 개 멀리서 빙빙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섬의 바닷바람을 풍력발전에 가장 적합한 속도로 만들어 전기를 만드는 재생에너지 사업이다. 이는 신안군 섬 곳곳에 크고 작게 설치된 태양광 발전과 더불어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구 환경문제를 극복하는 관광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또 자은도는 섬 곳곳에 파릇파릇한 대파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분수대의 물을 받으며 힘껏 제 색을 보여주고 있다. 토질이 사질토(모래가 많이 섞인 토질)라 대파를 재배하기에는 가장 적격이란다. 우리나라 대파의 최대산지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 신안군 섬 주민들은 6.25때 피난 온 분들도 많아서 문을 북쪽으로 내서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기대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한다.

# 김환기 화백 생가
중앙대교와 신안제1교를 거쳐 안좌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대표적 서양화가인 김환기 화백의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는 회색 기와와 더불어 전통적인 민간 한옥으로 우리 어렸을 때 시골의 부잣집 고택을 연상케 한다. 부친이 선주이면서 재산가였다 한다. 김환기 화가(1913~74)는 이곳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이다. 1936년 일본 니혼 대학교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이 당시 달, 여인, 항아리, 매화, 사슴 등의 한국적 소재를 두터운 마티에르 효과를 낸 화면에 단순화시켜 표현하는 서정적 반추상화로 정착되었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인 수필가 김향안(변동림)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 중 197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전후 14회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반추상화에서 화면 전체를 점으로 찍은 추상화로의 변신으로 당시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이러한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이곳 김환기 생가에는 한장도 걸려있지 않고 사진이나 모조 그림도 걸려있지 않다. 이는 재단에서 그림의 가치를 서양에 두면서 이곳과의 인연을 끊어버리려는 의도라 한다. 범인으로서는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다. 하물며 신안군은 어떠랴? 일방적 짝사랑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올거라는 기대를 접지 않고 이 가옥을 관리하고 있다 한다. 단지 학교에서 학생들이 김환기를 그리며 라는 미술대회만 개최하고 있다는데 언젠가는 김환기 미술 재단의 보편적인 결단을 기대해 본다.

# 화석 광물 박물관
아쉬움이 가득한 고택을 뒤로 가득하고 폐교를 개조하여 활용한 또 하나의 경우로 운영되고 있는 화석 광물 박물관을 관람했다. 운동장도 있는 곳에 간이 무대도 설치하여 행사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주민들을 위해서도 아주 유용한 공간으로 보인다. 이곳은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각종 희귀 광물과 고시대의 각종 화석들의 모형이 진열되어 자연사 박물관으로서 학생들에게 매우 유익한 박물관이었다. 여름 휴가 중 학생들이 잠깐 시간을 내서 보고 가면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섬의 어떤 마을에는 모든 색이 보라색으로 칠해져 보라색이 아닌 옷을 입거나 물건을 입출이 안된다고 하는데 체험의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안좌도에서 우리는 배를 탔다. 1층은 각종 차량을 싣고 2층에 승객들이 타는 큰 배다. 내가 98년벳남에 발령받아 여러 지방출장을 갈 때 타고 다녔던 배와 동일한 기종같다. 인류가 사는 형태는 비슷한가 보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비린내를 머금은 바다바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거칠게 얼굴을 때리고 벌어진 옷틈을 파고 든다. 선상에서 우리들은 끼리끼리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린 곳이 하의도다. 
하의도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에 도통한 도사가 답사하던 중 썰물 시 섬의 모양이 연꽃이 물에 떠있는 연화부수형이고 음기가 강한 섬이라하여 연꽃 하와 여자 옷 의자와 같이 붙여 하의도라고 했단다. 사실 우리는 이번에 하의도를 방문하기 위해 신안군에 온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9대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고, 특히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상(평화)을 수상한 대통령 생가가 있는 곳이라 더 그랬다.

#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하지만 우리는 김대통령 출생보다 훨씬 전에 토지를 되찾기 위한 농민들의 처절한 항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선 그곳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농민운동 기념관부터 방문했다.

바다를 간척해서 만든 농토를 지키기 위해 수백년간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워온 하의3도 농민들의 역사와 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이다. 이 운동은 조선중기 이후 370년동안 하의3도(하의도,상태도,하태도)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여 마침내 자신들의 농지를 되찾는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최초의 농민운동이다.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발단은 1623년 조선 인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는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결혼한 명문가 자손 홍주원(부마)에게 하의도와 신의면 상태도, 하태도 등 3개 섬의 땅 26만 m²에서 4대 후손까지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줬다.  1729년 5대에 이르렀어도 세금 징수권은 반환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세도가는 당초 인조에게서 받은 땅의 6배나 되는 165만 m²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주민들은 한양까지 올라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도리어 핍박만 받았다. 우매한 민중들이 세도가들을 이길 수 없었다.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세도가와 일본인 지주 등 6명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1914년 2월 20일 일본인 재벌 우콘 곤자에몬이 강압적으로 땅을 빼앗으려 하자 농민 1000여 명이 목포재판소와 경찰서가 있는 해변에 솥을 걸어 놓고 농성을 벌이며 항거했다. 이때 수백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1949년 억울한 사연을 제헌국회에 탄원했고 국회가 1950년 2월 소유권 무상반환을 결의했지만 625전젱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다 1956년 일본인 소유로 된 땅을 평당 200원에 주민들에게 유상 반환하면서 비로소 마무리 지어졌다. 1894년 동학농민(항쟁)운동보다 훨씬 전에 민중들의 지배층에 대한 투쟁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어 오늘날의 민중의 힘으로 발전되었고 이는 바로 하의도의 큰바위 얼굴에 대한 연민을 갖게 하였고 저항의 시대의 인물을 배출한 것이 아닌가 판단해 본다. 이 기념관은 2009년 4월 24일에 개관되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도 기념식에 참석했다.

# 김대중 대통령 생가
이윽고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에 도착했다. 김 대통령 생가는 원래 자리는 좁게 변형되어 옆 터로 옮겨서 재현했다 한다. 들어가면서부터 소위 풍수를 볼 줄도 모르면서 이 섬과 집터가 어떤 기운이 있기에 이런 분을 배출한 것인가? 매우 궁금했다. 그렇지만 어느 풍수지리사가 어느날 이곳 하의도와 김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고서는 이 지역은 도무지 대통령을 배출할 풍수는 아니라고 했단다. 그렇다면 뭐였을까? 물론 이희호 여사의 영향이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어쩌면 항상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과 더불어 살면서, 기득권에 침탈된 간척지를 농민운동 사상 가장 긴 처절한 370여년을 걸쳐 투쟁하여 되찾은 저항의 정신이 모인 이 섬의 기운을 받아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생가에는 김대통령의 생애와 업적 특히 민주투쟁의 과정과 남북통일의 길을 향한 여정 그리고 대통령 재임 시 업적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기록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대통령 사후 전세계에서 보내온 추모의 글로 대신한다.

[빌 클린턴, 前 미국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김 전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 햇볕정책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부인 힐러리와 나는 우리의 좋은 친구였던 김 전 대통령을 그리워할 것이다"

[미셀 깡드시 전 IMF 총재] “한국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를 맞아 몇가지 고비가 있었지만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게 사실이다…… 엄쳥난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뤄낸 김대통령은 만델라의 삶을 연상시킨다.”

[제임스 레이니. 前 주한미국대사] “평생을 민주화와 한국의 발전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이며 노벨 평화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고 본다. 김 전 대통령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으며, 특히 수십 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투옥을 당하는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고, 영웅이었다”

[통티모르의 오르타 전 대통령] “김대중은 가장 유명한 독재자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사람이었다. 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를 비난하는지 묻고 싶다. 질투 때문인가?” 더불어 그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생명을 걸고 반대했던 대한민국의 상반된 모습의 사람들에 대해 노벨상 위원회  군나르베르게 위원장의 말로 대신해 본다. “나는 한국인에게 노벨상을 주지 말라고 한국인들로부터 로비 시도를 받았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고 로비를 하려고 하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 한국인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나라에서 반대 편지가 대량 전달된 것이 특정지역에서 날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김대중의 위대함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에 감명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지금 그 당시 극렬히 반대했던 몇몇 분들을 만나면 지금도 반대하냐고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냐고 꼭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만일 당신도 로비를 하면 이 상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도 꼭 해 보고 싶다.

그런데 생가입구에 천사의 섬이라고 칭할 정도의 각종 천사의 모습을 한 천사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유럽 유적지 방문 시 석상과 같은 형태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좀 다른 생각을 했다. 이 태고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한 아시아 한적한 섬에 한국적인 문화와 전혀 다른 형태의 천사상은, 짚신신고 두루마기 입은 한국 촌노가 MBL 모자를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형상들 예를 들어 북 장구 꽹과리 등을 치는 모습, 부채춤 추는 모습, 농촌이나 어촌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 등등 한국의 섬의 풍경과 굉장히 어울리는 형상이 많을텐데 왜 하필 어색한 저기 먼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형상들이 여기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이곳뿐만 아니라 섬 전체에 1004개의 천사상을 세우고 있다 하여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서양 천사상이 설치될 것인데 더욱 더 생소함을 느낄 것 같다. 한국자연의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흙위에 가브리엘 상인가? 미카엘 상인가? 어울리지 않는다.

# 큰바위 얼굴
학창시절 교과서에 큰바위얼굴 이야기가 실렸던 기억이 있다. 이곳 하의도에도 큰 바위 얼굴이 있다하여 가 봤다. 여러 섬 중 하나의 섬이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배경으로 얼굴 옆 모습이 투영되면서 보니 영락없는 큰 바위 얼굴이다. 그렇다. 이 섬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대통령과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을 계속 마음 속에 그리며 그것이 마음에 투영되면 또 다른 민족의 인물이 나오지 마란 법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해설사가 안내한 곳에 서서 이 얼굴과 뽀뽀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 기운이 우리 해외 언론인들에게 전달되어 전세계 곳곳에서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면 향후 50년 내에 서양의 자칭 우수민족들을 추월하리라고 확신해 본다.

붉게 바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빛에 비친 큰바위 얼굴을 뒤로하고 우리는 김대중 유스호스텔에 투숙했다. 개장한지 얼마 안되어 아마 우리들이 첫 단체 손님인 것 같다고 설명해 준다. 콘도 같은 시설이지만 취사는 안되는 그런 곳이었다.

아침 식전 얼른 일어나 유스 호스텔에서 가까운 김대통령 상가를 다시 방문했다. 어제 방문 시 좀 서둘러서 본 느낌이 들어서다. 사진도 찍고 기도도 더 했다. 몇몇 분들이 나보다 먼저 산책하는 모습도 보였다. 각자의 마음에 어떤 생각들로 그려졌을까?

# 신의도 염전지대
아침 일찍 전복죽을 한그릇씩 먹고 원기 회복하여 삼도대교를 건너 신의도의 거대한 염전지역을 시찰했다. 과거에 신안군에 멍텅구리 배에 잡혀 새우양식이나 염전산지에 갇혀 고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과정이 기계화되어 많은 인력이 필요치 않아 그런 경우는 있지 않고 그때도 그 후에 동일한 보상을 다 해 줬다 한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다시 그곳에 가서 일 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한다. 여하튼 이 염전지대에서 우리나라의 천일염의 대부분을 공급한다니 대단한 곳이다.

오전 10시경 하의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초 겨울을 머금은 차가운 바다바람을 헤치며 하의도를 떠나면서 우리의 신안군 방문 일정을 끝났다.

그리고 우리를 실러온 배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10여명의 아이들이 자전거와 같이 내리는 것을 봤다. 이곳 신안군은 자전거로 섬을 일주하는 관광도 있다. 깨끗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 처와 같이 자전거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하의도에서 안좌도로 향하는 배를 타고 승객층인 2층으로 올라가니 차가운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하의도에 들어갈 때와 달리 일행은 2층의 방으로 들어가서 바람을 피했다. 그런데 같이 동행한 버스 기사가 우리 일행에게 문을 빨리 열어주다 잠깐 실수로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문틈에 세게 끼워지면서 크게 다쳐 많은 피가 나왔다. 얼른 배의 응급의료 장비로 지혈을 하고 배에서 내린 후 신안군 보건소로 가서 간단한 치료로 지혈을 한 후 안전하게 서울까지 운전하여 무사히 도착했다. 그 기사분이 큰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아 완쾌하기를 바란다.

 

 서울로 출발하기 직전에 신안군 관광협의회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와서 몇몇 분들이 신안군 시찰에 대한 소감과 당부, 그리고 관광산업으로의 가능성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역시 훌륭한 자연경관과 노벨상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가 잘 어울려지면 전 세계의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대한민국의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이 지역이 그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되려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더 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신안군 관광협의회에서 나온 관광사업부 부장과 차장의 기획력 그리고 신안군민들의 친절과 열정이 향후 신안군이 아시아를 벗어나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고 본다. 매 끼니 먹게 된 싱싱한 해산물은 나의 혀끝에서 육지에서는 느끼지 못한 식감을 받으면서 뱃속으로 들어가 모처럼 긴 시간의 여정에 나의 두다리와 두눈이 지치지 않게 하는 풍부한 관광상품의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도 있으니 금상첨화이다. 몸과 마음의 평화를 동시에 받아 삶의 평화를 누리고 갈 것이다.

기고 글- 베트남 ‘베한타임즈’ 김홍업 발행인.
기고 글- 베트남 ‘베한타임즈’ 김홍업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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