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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故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역사 속으로 사리진 대우그룹…세계경영 신화 김우중 전 회장 별세
[인물][ 故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역사 속으로 사리진 대우그룹…세계경영 신화 김우중 전 회장 별세
  • 윤영주 기자
  • 승인 2019.12.10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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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숙환으로 9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10일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옛 대우그룹 관계자들과 정·재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대기업 오너일가를 비롯해 국회의원들을 포함, 10일 하루 동안 3000여명 가량이 빈소를 찾았다. 김 전 회장의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 장병주 세계경영학회 회장이 조사를 맡아 진행될 예정이다.

김 전 회장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그은 인사로 불린다. 최고에서부터 최악의 상황을 겪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글로벌 경영의 선구자였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까지도 주변인들에게 세계 경영과 후학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해체를 겪으며 흔적만 남은 대우그룹은 김 전 회장의 별세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다만 김 전 회장의 세계 경영에 대한 정신은 대우세계경영학회의 해외 청년사업가 양성 사업을 통해 명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김우중 전 회장은 샐러리맨 출신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분류된다. 섬유수철 업체인 한성실업에서 근무를 시작,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1967년 3월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고 김우중 전 대우회장 빈소. [MBC 뉴스 캡처]
고 김우중 전 대우회장 빈소. [MBC 뉴스 캡처]

 

대우실업의 자본금은 500만원으로 현재가치로 따지면 1억5000만원에 불과했다.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고, 1973년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와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고, 1978년에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4년 세운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서 주력기업으로 키웠다.

창사 15년 만에 체급을 부쩍 키운 대우그룹은 1982년 대우실업을 ㈜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제대로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 회사를 키웠다.

1993년에 '세계경영 우리기술'을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공격적으로 나섰고, 19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쌍용차도 인수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삼성과 LG를 제치고 재계 2위 대기업에 이름을 올렸지만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고 김우중 전 대우회장 장례식장에서 추모객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 KBS 뉴스 캡처]
고 김우중 전 대우회장 장례식장에서 추모객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 KBS 뉴스 캡처]

 

특히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무엇보다 2000년에 수십조원 규모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 수준이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이후 '제2의 고향'으로 불리는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귀국, 자신이 사재를 출연해 세운 아주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입원을 거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대우그룹 임직원들은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매년 창업기념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해왔으며 김 전 회장을 포함해 300여명이 참석해 왔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경제성장기에 대우그룹이 중요한 역할은 했지만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으로 투자자들의 손실을 입히는 등의 문제도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전반적으로 김 전 회장이 생전에 제시한 글로벌 경영과 창조적 도전 정신은 이어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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