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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대한민국 화학·전자 산업 중흥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인물] 대한민국 화학·전자 산업 중흥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 정지수 기자
  • 승인 2019.12.15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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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LG 명예회장.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LG 명예회장.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
 
이에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고,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故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기업 경영에 전념하며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으로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명예롭게 은퇴한 ‘참 경영인’이었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62세를 일기로 1969년 12월 31일 타계함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공장에서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키다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지 불과 1년 수 개월 만에 부친의 유고로 마음의 준비 없이 회장 자리에 오른 구 명예회장은 이후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나라 안팎의 어려운 경영환경을 극복하고, 화학?전자 산업 강국을 위한 도전과 21세기 선진 기업 경영을 위한 혁신의 시대를 펼쳤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또 그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경영 혁신을 추진해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 도입, 민간기업 최초의 기업공개,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이 25년 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임종을 맞을 때까지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고, 인재 양성을 위한 공익활동에 헌신하는 열정으로 충만한 여생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자로의 업적은 물론 은퇴 후의 삶까지 재계의 귀감으로 존경을 받아 왔다.
 
슬하에 장남 故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해 구훤미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고문, 구미정씨,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 故 하정임 여사는 지난 2008년 타계)
 
■ 창업 초기부터 회장 취임 전까지 20년간 생산현장 지키며 LG의 비약적인 성장에 중추적 역할
 
구 명예회장은 LG그룹의 창업 초기부터 회사 운영에 합류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회사를 일궜다. 1970년 그룹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킨 연유로 한국의 2세 경영인 가운데 구 명예회장만큼 현장을 잘 알고 기술을 잘 이해하는 기업인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 명예회장이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47년, 부친이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구 명예회장은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예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에 1950년 교편을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밤에는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아침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하는 등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판자를 잇대어 벽을 만든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벽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어와 자고 나면 온 몸이 모래투성이였고, 겨울에는 그 틈으로 찬바람이 쏟아져 슬리핑백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자야 했다. 잦은 모래바람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면 그 모습은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배달 과정에서 뚜껑이 파손되는 일이 생기자 구 명예회장은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크림통 뚜껑 개발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플라스틱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정보가 없던 때라 집 뜰의 가마솥에서 베이클라이트나 요소수지 등의 원료를 녹이면서 실험에 열중했었다.
 
구 명예회장은 락희화학과 금성사의 부사장에 이르는 동안 부산의 범일동공장, 부전동공장, 연지동공장, 온천동공장 등 시설확장의 중심에 한결같이 서 있었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설비를 점검하고 기계를 발주하는 등 공장 신•증축을 직접 해 내면서 화학•기계•전기 등에 관해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화학과 전자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 치약 튜브는 납 표면에 주석을 입히고 그 위에 인쇄를 했었는데, 생산이 뜻대로 되지 않자 구 명예회장은 과거 공장에서의 도금 경험과 주변 기술자들로부터 흘려 들은 단편적인 기술들을 모아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냉간 압착 튜브 코팅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락희화학에서의 플라스틱 가공 경험은 훗날 금성사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플라스틱 가공에 필수적인 자체 금형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당시로서는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구 명예회장은 국내최초의 플라스틱 생활용품, 비닐제품, 라디오, 선풍기, TV 등 새로운 화학과 전자 제품의 탄생과 호흡을 늘 같이 해 왔다.
 
흔히 경영수업이라고 하면 영업이나 기획, 해외지사에서 출발해 몇 년간 실무를 보다가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경영자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이에 반해 구 명예회장은 십 수년 공장 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 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구 명예회장이 여느 2세 경영인과는 달리 창업과 성장을 함께 주도한 1.5세대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 이유도 그가 부친의 창업 초기부터 합류해 20년간 생산현장을 도맡으며 사업을 정착시켜 공고히 성장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 아래 연구개발에 열정 쏟아 화학?전자 산업강국으로 도약의 기틀 마련 ]
   
구자경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어 우리나라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끈 경영자였다. 그가 열정을 쏟은 연구개발의 결과로 축적된 기술력 덕분에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과 사업 확장이 가능했고, 오늘날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화학?전자 산업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외쳐댈 때에도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며 ‘강토소국 기술대국’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구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믿음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작물을 가꾸는 방식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수확량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과학과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이후 교직생활을 할 때도 구 명예회장은 제자들에게 늘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그런 이유로 회장에 재임하던 25년 동안에도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개발’ 등 표현은 달라도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기술’을 경영 지표로 내세웠다.
 
■ “국민생활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보자”며 민간 기업 최초의 중앙연구소 설립 등 재임 기간 70여 개 연구소 설립해 기술 수준 도약시켜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대부분의 연구실이 각 공장 별로 소규모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이 곳에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가 집행되었다.
 
또 제품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키고,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하는 등 전문가 육성에 힘썼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서는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하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이어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인 19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에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구 명예회장의 이 같은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비장한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산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고,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본인이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경영 철학에 대해 “첨단 산업 분야에서 제품 국산화를 통해 산업 고도화를 선도할 것이고,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 활동의 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해 나갈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 연구개발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수 인재 유치와 육성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 8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에 LG화학 종합기술연구원 설립을 추진할 당시 구 명예회장은 프로젝트 출범 초기부터 우수 기술인재 유치를 위한 통 큰 투자를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연구 개발 조직에도 끊임없이 동기와 의욕을 북돋아주는 일에 늘 적극적이었다. 그는 연구소에 관한 한, 우수 인력을 어느 곳보다 우선해서 선발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임원의 정원도 제한하지 않았다. 또한 연구소를 지원하거나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한 예산이라면 우선적으로 승인해 주었다.
 
또 1982년에는 그룹 ‘연구개발상’을 제정해 연구원들의 의욕을 북돋우고,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인재 사랑은 오늘날 LG가 R&D 인재를 중시하는 기업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열정과 인재에 대한 사랑에 남달랐었기 때문이었는지,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석 달여 앞둔 1994년 11월, 나흘에 걸쳐 전국 각지에 위치한 LG그룹 소속의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 보았고, 훗날 그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에어컨, 전자식 VCR, 슬림형 냉장고 등 국내 최초제품 잇달아 선보이고 생산시설 확장하며 우리나라 화학?전자 산업 성장 주도
 
구자경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최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를 회상하며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컬러TV 생산은 1975년 구미 공단에 연산 50만 대의 대단위 TV 생산 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됐다. 구미 공장의 준공은 한국 전자 공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나라 전자 공업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컬러TV는 국내의 컬러 방송 시기가 미정이라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글로벌 기술 흐름에 뒤쳐지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전량을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구미 공장을 비롯해 현재 LG의 국내 주요 생산거점이 되고 있는 전자 및 화학 분야의 수많은 공장을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75년 금성사 구미 TV생산공장에 이어 1976년에는 냉장고, 공조기, 세탁기, 엘리베이터, 컴프레서 등의 생산시설이 포함된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립했다. 창원공장 준공식 당시 구 명예회장은 “이 공장이 서고 보면 냉장고의 컴프레서 제품까지 완전 국산화될 것이고, 기종도 다양하게 개발하게 될 것이므로 전기 부문의 새로운 비약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1983년부터 1986년 말까지는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하며 오늘날 전자 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화학분야에서는 1970년대 울산에 하이타이(가루비누), 화장비누, PVC(폴리염화비닐)파이프, DOP(프탈산디옥틸), 솔비톨 등 8개의 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면서부터 종합 화학회사로의 발돋움을 본격화했다.
 
또 전남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PVC레진,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 납사(나프타) 분해공장 등을 구축해 정유(당시 호남정유)부터 석유화학 기초유분 및 합성수지까지 석유화학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럭키 여천공장 가동은 70년대까지 가공산업 위주였던 국내 화학산업을 석유화학 원료산업으로 전환하는 이정표로, 원료의 안정적인 수급이 중요한 석유화학 산업에서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를 직접 생산하게 됨으로써 석유화학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늘어나는 제품 수요에 대응하고 전국적 제품 공급을 원활이 하기 위해 한반도의 중간지점인 충북 청주에 치약, 칫솔, 모노륨, 액체세제 등을 생산하는 생활용품 종합공장인 럭키 청주공장을 건설했다.
 
또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이 플라스틱 사업에 전념하고자 지난 1954년 완전히 철수했던 화장품 사업으로의 재 진출을 결정하고, 청주공장에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 공장을 건설하여 창업 당시의 사업영역이던 화장품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 공장을 인수해 국제규모의 종합화학으로 커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수 당시의 시설을 몇 차례 개조하고 증설하여 옥탄올, 이소부탄올, 아크릴레이트 등 석유화학제품의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 시대를 한 발 앞서 21세기 선진 기업경영의 길을 개척하고, 국내 고객중심 경영의 효시가 된 ‘혁신 전도사’]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 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은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특히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 틔웠고, 또 물건을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었음에도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나아가 아예 회사의 경영이념을 고객가치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혁신적인 경영 활동은 재계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내 기업들에게 경영활동 선진화를 위한 좋은 표상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과감한 ‘혁신’은 구 명예회장에게 하루도 놓칠 수 없는 경영 화두였고, 경영의 실체였다.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도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고, 은퇴 후에도 경영혁신 활동을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으로 꼽으며 스스로 ‘혁신의 전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 1970년 민간기업 최초로 락희화학 기업공개하며 투명경영 활성화 앞장
 
구자경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이제까지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다른 기업들보다 한 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하는 동안에만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州)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된 해외 생산기지였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금성사 헌츠빌 공장 설립에 대해 “한국의 기업이 이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성공적인 해외 진출 케이스로 헌츠빌 공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 합당한 원칙과 투명한 경영 통한 상호 신뢰로 모범적인 합작경영 이끌어
 
구자경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고, LG는 세계의 중앙으로 활동 무대를 과감하게 확장시켰다.
 
“럭키그룹은 두 가지 면에서 합작의 명분을 찾아 왔다. 하나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럭키그룹의 독특한 기업풍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로 믿고 존중할 줄 아는 조직 문화, 거슬러 올라가면 그룹의 모태가 된 ‘인화(人和)’에 그 뿌리가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던 구 명예회장은 서로에게 합당한 원칙을 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상호 신뢰를 얻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많은 합작법인을 운영하면서도 파트너와의 분쟁이 없이 합작사업의 국제적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합작 사례로는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 사와의 합작을 꼽을 수 있다. 50대 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합작의 기본을 존중하고, 원칙을 공정하게 지키면서 한치의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왔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70년대 초반에 두 건의 화재 사고를 겪으면서 칼텍스에 대해 커다란 신뢰를 갖게 되었다. 71년 호남정유가 입주해있던 건물에 불이나 중요 서류가 타버렸을 때 칼텍스는 사본을 제공하며 복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72년 여수 공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는 칼텍스 측이 사전에 안전관리를 철저히 해둔 덕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74년에는 금성통신이 외국과의 합작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했을 당시, 합작 파트너였던 지멘스 측의 협조가 원활해 언론에서 합작사업의 모범 사례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멘스와의 합작은 선진기술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많을 때는 10여명의 지멘스 기술자가 금성통신에 파견되어 1년 이상 머물며 금형기술을 전수해주었고, 또 가전부문에서도 라디오나 냉장고의 부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럭키그룹이 합작 사업의 좋은 선례를 남기면서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 많은 외국기업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럭키그룹에 사전 자문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
 
■ 전문경영인 중심의 「자율과 책임경영」체제 도입, 고객중심 경영이념 발표 등 혁신을 통해 경영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 전도사”
 
구자경 명예회장은 개방과 변혁이 소용돌이 치는 1980년대를 겪으면서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그는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 수립을 진두지휘 해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이는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으로 특히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은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서는 LG 내부에서도, 그리고 재계에서도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경영체제 개념이었다.
 
시행 초기 그룹 내부에서도 ‘중요한 결정 권한은 회장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계열사 사장들 또한 타율적인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해 회장을 찾아가 의사결정을 요청했다가 질책과 훈계를 듣고 나오곤 했다.
 
1990년 2월에는 ‘고객가치 경영’을 기업 활동의 핵심으로 삼은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을 선포했다.
 
‘고객가치 경영’은 한국 재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제 막 주목 받기 시작한 새로운 경영 조류였다. 이를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것은 기업경영의 축을 공급자 중심에서 고객 중심으로 전환한 혁신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경영혁신 활동이 선언적으로 그치지 않도록 직접 ‘혁신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구 명예회장은 일일이 임직원들을 만나 경영혁신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꼬박 2년에 걸쳐 그룹 전 임원 500여명과 오찬 미팅을 가졌고, 어느 해에는 1년 동안 현장의 임직원들과 간담회 형태의 대화 자리를 140여차례나 갖기도 했다.
 
임직원뿐만 아니라 고객의 목소리도 직접 들으러 나섰다. LG전자의 서비스센터를 비롯해 당시 LG가 사업하고 있던 분야에서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들었다. 구 명예회장은 현장에 갈 때 마다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는 말을 항상 잊지 않고 강조했다.
 
그룹 내부에서는 사내 문서의 결재란에 ‘고객결재’ 칸을 회장 결재 칸 위에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고객을 생각하고, 모든 회의에서 고객의 의견을 최고로 존중하겠다는 문화를 만들어갔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2년에 혁신의 바람이 LG를 넘어 국내 경제 전반에 퍼질 수 있도록 LG의 경영혁신활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오직 이 길밖에 없다」를 집필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 책을 통해 ‘혁신의 풍토가 한국 기업 전반에 뿌리내려 치열한 경쟁적 토양이 형성될 때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뒤, ‘LG의 혁신활동 경험이 경쟁사를 비롯한 우리 나라 기업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며 LG의 혁신활동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 향상에 일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구 명예회장의 “자율과 책임경영”이라는 혁신적인 경영체제 도입과 이를 정착시키고자 쏟아 부은 열정은 LG에서 전문경영인 경영 방식이 조기에 정착되고, 나아가 훗날 LG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수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선진화된 지배구조와 투명경영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LG가 도입한 ‘고객경영’은 시장개방이 본격화되던 90년대 초중반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94년 중앙대학교는 ‘참 경영인 賞’ 수상자로 구자경 명예회장을 선정하고, “국내 기업인들 가운데 고객경영의 효시가 된 점”을 선정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 인재육성에 깊은 관심… LG 인재 육성의 요람 ‘인화원’ 개원
 
구 명예회장은 평생을 두고 인재 확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인재를 육성해 나갔다.
 
‘그 시대에 필요한 능력과 사명감으로 꽉 찬 사람’이 인재라 여긴 구 명예회장은 이러한 인재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스스로 성장하며 변신하고 육성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구 명예회장은 완성된 작은 그릇보다는 가꾸어 크게 키울 수 있는 미완의 대기(大器)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즉 인재를 선발하는 것도 잘 해야겠지만, 그보다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제도에 무게를 두어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에 구 명예회장이 그룹의 영속적 발전을 위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실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재 양성기관인 ‘LG인화원’의 설립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인화원을 건립하면서 ‘기업의 백년대계를 다지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표현으로 그룹 차원의 관심과 협력을 당부키도 했다.
 
1988년 인화원 개원식에서 구 명예회장은 “기업은 인재의 힘으로 경쟁하고 인재와 함께 성장한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의 번영과 복지도 인재의 빛나는 창의와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인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라며 인화를 바탕으로 한 인재 육성의 의지를 천명했다.
 
이후, LG인화원은 교육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 측면을 강화해 실무 실행력 증진에 초점을 맞추며 기존의 이론 교육 중심 체계를 혁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1년에는 기업 교육과정의 우수 사례로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뽑은 세계 12대 기업 대학에 선정되기도 했다.
  

■ 1987년 사회적 격동기에 전경련 회장 맡아 사회와 소통하며 재계위상 재정립
 
구자경 명예회장은 1987년 2월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후 민주화 진전에 따른 전환기에 재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재계 원로들의 추대로 전경련 회장을 수락한 구 명예회장은 취임기자회견을 통해 “전경련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새로운 발전이 요청되는 이때, 분에 넘치는 중책이긴 하나 징검다리가 되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천명했다.
 
구 명예회장이 18대 전경련 회장에 재임한 1987년부터 89년까지는 우리사회의 모든 질서가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인데다 대내적으로는 혼신을 다해 추진하는 경영혁신과 사업장의 대형분규가 맞물리는 참으로 어렵고 벅찬 시기였다.
 
취임 후 그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합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전경련 산하에 ‘경제사회개발원’을 설립하고, ‘국민 속의 기업인, 국민경제를 위한 기업’을 모토로 기업 이미지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전경련과 기업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선 일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구 명예회장의 전경련 회장 재임 기간은 2년 단임이었다. 재임 당시 88서울올림픽과 같은 범국가적 행사를 치르고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민간주도 경제의 틀을 잡아가는데 노력하며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단행, 활발한 공익활동, 은퇴 후 자연을 벗삼은 간소한 ‘자연인’의 삶 등 경영인 인생의 모범을 보여준 재계의 큰 어른 ]
 
구자경 명예회장은 재계의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LG를 이끈 경영인으로서 보여준 성과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스스로 회장직을 후진에게 물려주어 대한민국 기업사에 성숙한 후계 승계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한 사회 공익활동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스스로는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신 자연을 벗삼아 간소한 여생을 보내며 은퇴한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도 재계에 귀감이 되며,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단행, 창업세대 원로 경영진과 동반 퇴진하며 세대교체 이뤄 재계에 귀감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당시 WTO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이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 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구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행운보다는 고통이, 순탄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지만,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늘 곁에 있었기에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경영혁신에 자발적으로 동참해 준 임직원들의 저력과 노고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명과 감사로 간직하게 될 것”이라며,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이제 공인의 위치에서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되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서 무상감도 들지만,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감회 어린 이임사를 끝으로 임직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식장을 빠져 나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결심하면서 ‘멋진’ 은퇴보다는 ‘잘 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다. 육상 계주에서 앞선 주자가 최선을 다해 달린 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턴 터치가 이루어졌을 때 ‘잘 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경영 승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것이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는 그가 추진해 온 경영혁신의 일환이었고, 본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혁신 활동이었다. 그는 훗날 회고에서 “은퇴에 대한 결심은 이미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차기 회장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내 나름의 밑그림이었다. 그래서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되었고, 혁신의 대미로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후에 구 명예회장은 지인들에게 당시 은퇴할 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섣달을 보내며 나름의 감회를 지니게 되지만 내게는 각별히 다른 의미가 하나 더해진다. 선친의 기일 역시 섣달 그믐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의 섣달그믐만큼은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마음속의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 시대의 흐름에 맞춰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관계 정리도 ‘아름다운 이별’로 한 치의 잡음 없이 마무리
 
구자경 명예회장이 퇴임 후 2000년대 들어 3대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도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57년간 사소한 불협화음 하나 없이 일궈온 구씨,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업매각이나 합작, 국내 대기업 최초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 모든 위기 극복과 그룹 차원의 주요 경영 사안은 양가 합의를 통해 잡음 없이 이뤄졌다.
 
양가는 기업의 57년의 관계를 아름답게 매듭짓는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 또한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했다. 구 명예회장 직계가족은 전자, 화학, 통신 및 서비스 부문 맡아 LG그룹으로 남기기로 했고, 허씨 집안은 GS그룹을 설립해 정유와 유통, 홈쇼핑, 건설 분야를 맡기로 했다. 또 전선과 산전, 동제련 등을 묶어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창업고문이 LS그룹을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순탄하게 계열 분리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창업회장의 뜻을 받들어 구 명예회장이 합리적인 원칙에 바탕을 둔 인화의 경영을 철저히 지켰고, 상호 신뢰와 의리를 바탕으로 사업을 이끌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교수 해외연구, 학교설립과 전자도서관, 청소년을 위한 과학관 등 인재 양성에 각별한 열의
 
구자경 명예회장은 사회 생활의 첫 발을 교직에서 시작했었다. 젊어서는 교사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재목을 길러내고, 노년에는 자연을 가까이 하며 농장을 가꾸는 것이 그가 원래 꿈꿨던 삶의 모습이었다.
 
훗날 퇴임 후 “내가 가업을 잇지 않았다면 교직에서 정년을 맞은 후 지금쯤 반듯한 농장주가 돼있지 않았을까”하고 말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회장으로 재임하면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지 않았고, 은퇴 후에는 마음 속으로 그려왔던 삶의 길을 걸으며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다양한 분야의 공익사업에 공을 들였지만,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분야에 관해서는 각별한 열의를 쏟았다. 그는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 뿐”이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부친이 1969년 설립한 LG연암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젊은 대학 교수들이 해외에서 견문을 넓히고 연구의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대학교수 해외연구 지원 사업을 펼쳤다. 구 명예회장은 재단 이사장 역임 당시 거의 빠짐없이 연암해외연구교수 증서수여식에 참석해 교수들을 일일이 격려했을 만큼 이 지원사업에 큰 애착을 가졌다.
 
구 명예회장은 1973년에는 학교법인인 LG연암학원을 설립하고,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취지로 1974년 천안에 연암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984년에는 우수한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경남 진주에 연암공업대학을 설립했다. 특히 두 대학이 소수정예 특성화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설립초기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건축가 고 김수근씨가 설계했던 자신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사저를 기증해, 1996년에 모든 문헌 자료를 디지털화한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을 개관했다. 2006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세계최초로 유비쿼터스 기술을 활용한 음성도서 서비스인 ‘책 읽어주는 도서관’을 구축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사업을 체계적으로 펴고자 ‘LG복지재단’을 설립해 지방자치단체에 사회복지관과 어린이집을 건립해 기증하고, 저신장 아동에 성장호르몬제 지원, 독거노인에 생필품 지원 등 사회 곳곳의 소외이웃을 돕는 복지사업을 펼쳤다.
 
또 LG연암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문화예술의 창작과 교류를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치 아래 2000년 LG아트센터를 건립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데에도 힘썼다.
  
■ 은퇴 후 버섯연구 등 취미활동과 함께 자연인으로서 여생 보내 재계의 모범이 되는 은퇴 경영자의 삶 실천
 
구자경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았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에 따라 은퇴한 이상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는 것이었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 결심을 철저히 지켰다.
 
대신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의 취미 생활은 교직 생활 때부터 손을 댄 나무가꾸기로 시작해 난, 버섯 연구까지 자연과 벗삼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는 무엇을 하나 시작해도 단순히 여가로 그치지 않고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파고들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 경영자로서의 열정과 비례해 누구보다 소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인간 구자경 ]
  
■ 유년시절엔 유가의 엄격함과 실사구시 중시 가풍 속 리더십 키워, 회사 합류 전까지 교사로 근무하며 ‘호랑이 선생님’ 별명
 
구자경 명예회장은 유가(儒家)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도 실사구시를 중시하며 번성해 온 능성 구씨 집안의 후손으로, 1925년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슬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었던 유년기의 구 명예회장은 유림에서 존경 받던 증조부 만회 구연호(晩悔 具然鎬) 공의 사랑과 외유 내강형의 선비로 유교의 전통과 신문화의 합리적 사고를 함께 지녔던 조부 춘강 구재서(春崗 具再書) 공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 하는 가통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심 역할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흐트러짐 없이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게 구 명예회장에게 자리잡은 가치관은 경영활동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경영자로서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편, 항상 리더로서의 역할과 책임의식을 먼저 생각하게 했다.
 
실제 구 명예회장은 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외부 업무를 마친 후 단 10분이 남아도 꼭 회사로 돌아온 후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거의 어기지 않았다. 또 몸이 좋지 않을 때 조차도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정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중요시 여겼다. 또한 지방 공장을 방문하거나 외국 출장을 갈 때도 불필요한 의전 절차를 삼가도록 했는데, 이는 회장이 먼저 모범을 보여 허례허식을 경계하는 생각에서였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 서부 경남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진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됐다. 중학교 시절에는 씨름과 같은 운동과 서예 등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구 명예회장의 유년 시절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지수초등학교를 다닐 때 과학을 접목한 농경법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 친화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것과 교사의 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후에 진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희망’을 주제로 한 작문 시험에서도 주저 없이 교사로서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44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 후 1년 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진주의 한 소학교로 발령 받았다. 헌데 그 소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일본에 기증할 경전투기 구입 건으로 구 명예회장의 부친이자 당시 구인상회를 운영하던 구인회 사장에게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에 출근해보니 부임 인사를 받는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자리도 구석으로 배정받게 됐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차가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다음날부터 출근을 포기하고 말았다.
 
귀향해 한 동안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고 있던 차에 마침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발령받아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몰두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을 교직에 몸담았는데, 무엇보다 학교 규율을 세우는 것을 우선시하여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제자였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당시 모습을 회상하며 “체육시간에 호루라기를 불며 구령을 붙이는데 그 모습이 하도 엄해 우리는 벌벌 떨었지요. 정말 호랑이 선생님이 오셨구나 하면서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미래에는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교육의 중점목표에 기술력 양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학생들에게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당시 과학 과목의 교재도 마땅치 않아 일제시대의 책을 참고하여 구 명예회장이 스스로 교재를 만들어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산수와 과학의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고, 매주 상당한 양의 숙제를 내 주는 등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중학교 진학 반인 6학년 담임을 줄곧 맡기도 했다.
  
■ 3대 회장인 故 구본무 회장에게 엄격한 경영 수업과 함께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생활자세 가르쳐
 
구자경 명예회장의 가치관과 경험은 장남인 故 구본무 회장이 2018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故 구본무 회장은 회장 취임 전까지 20여년간 실무경험을 쌓았는데, 이는 구자경 명예회장이 본인 스스로도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20년간 현장에서 경영인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데다, 평소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는다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기업의 회장직 승계자는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디뎌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故 구본무 회장은 회사의 가장 기초조직인 과장 책임자부터 단계적으로 실무를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경영실무와 경영자적 리더십 및 안목을 쌓아갔다.
 
구 명예회장의 여러 가르침과 교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 중 하나는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생활자세였다. 1995년 회장직 승계 당시 구 명예회장은 故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경영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이유에서든 약속을 지키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는 구 명예회장의 철칙도 故 구본무 회장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평소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기고 항상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으면서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해왔다.
  
■ 문중에서 편하게 부를 수 있게 상남(上南) 아호 지어, 초등학교 모교 후배 서울 방문 땐 멀미약 직접 챙기기도
 
구 명예회장이 스스로 ‘상남(上南)’이라는 아호를 지은 연유는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그의 호칭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상남’은 고향집 앞에 증조부인 만회 구연호 공이 놓은 작은 다리인 ‘상남교’에서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도랑을 치고 호롱불을 밝혀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던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은퇴 후 머물렀던 연암대학교의 농장 내 사무실도 대기업 그룹의 명예회장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공사장이나 작은 상가의 사무실로 여겨질 만큼 수수하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 후 모교인 지수초등학교 후배들의 서울 방문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떠날 때는 사진을 같이 찍고 선물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어린 학생들이 장거리 여행에 지쳐 멀미할 것을 걱정하여 직접 멀미약을 챙겨준 것이 인상적이었던지 학생들이 감사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25년 간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회장이었지만, 은퇴 후 일체의 허례와 허식 없이 간소한 삶을 즐기며 그야말로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현역 시절의 열정과 노력하는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는 기술개발에 매진했던 경영인의 모습 그대로였고, 자연인으로서 제2의 인생 은퇴한 경영자의 모범 그 자체였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시련 많은 현대사 속에서도 기업경영의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고, 언제나 남보다 앞선 생각,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 경제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던 큰 기업인이었다. 회장으로 25년간 외롭고 힘든 공인의 입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와 오늘날 LG를 일궈낸 진정한 참 경영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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