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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 회장 추도사 각계 인사로부터 이어져
故 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 회장 추도사 각계 인사로부터 이어져
  • 박가희 기자
  • 승인 2021.01.11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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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만기 한국인간개발연구원(HDI) 회장 [사진=한국인간개발연구원 제공]
故 장만기 한국인간개발연구원(HDI) 회장 [사진=한국인간개발연구원 제공]

 

지난 7일 83세로 타계한 故 장만기 한국인간개발연구원(HDI) 회장에 대한 정재계 인사들의 추도사가 이어지고 있다. 고인에 대한 존경과 신뢰에 대한 지인들의 아쉬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주요 인사들의 추도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회장)

큰바위 얼굴~*

인간개발연구원 장만기회장님이 별세하셨습니다. 1980년대 저의 평생 스승이신 김동호장군님 삼천리 이장균회장님과 세분이 모대학 최고경영자과정에 다니시면서 삶의 철학과 인품에 서로 매료되어 깊은 교분을 맺으셨습니다. 저는 젊은 나이로 한창 방송하고, 강의하고 다닐 때인데 어느날 김장군님께서 삼천리 회장실로 부르시더니 이장균회장님을 소개해주셨고 그때 아드님인 현 이만득회장과도 인사를 나누었고 평생 귀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장만기회장님께서는 그전부터 저를 장성아카데미 강사로 인간개발연구원 강사로 여러번 불러주셨고 평생 늘 따뜻한 격려와 칭찬으로 저를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좁은 국토에 지하자원은 부족하지만 우리에겐 귀중한 인간자원이 있다"

장회장님의 가르치심은 제가 대학총장을 할 때나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을 할 때도 늘 가슴에 담고있었습니다. 평생 우리나라의 발전을 이끌고 국격을 높이신 큰바위얼굴이십니다. 장회장님은 떠나셨지만 그 고귀한 뜻은 인간개발연구원을 통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윤은기 올림

 

 

■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이경숙 올림(전 숙명여대 총장)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존경하는 장만기 회장님,

지난 2년 동안 투병하시는 것을 보면서 다시 건강해지시기를 소망했던 회장님께서 금년 들어 가장 추운 날인 오늘, 소천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말씀, 뜨거운 열정으로 늘 청춘 같은 삶을 살아오시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셨기에, 이 땅에서의 나그네 길을 마치시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가신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더욱 춥고 아파 옵니다.

회장님께서는 대한민국과 국민을 사랑하시는 선견자이셨습니다. 46년 전 경제 성장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모두가 주장할 때, 인간 개발이 국가 발전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인간개발연구원을 창립 하셨습니다. 연구원의 비전을 “세계의 평화와 국가의 번영과 인간의 행복”으로 내세우시고, 인간 개발은 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으시고, 기업가 경영인들에게 조찬학습 모임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원대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하여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모토를 만들고, 좋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공감하고 사랑하면서 연결되어, 아름답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솔선수범하는 섬기는 리더이셨습니다.

능력과 성품을 갖춘 회장님께서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권력과 명예와 돈과 지위를 추구하지 않고,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동기 부여 시켜 주고 잠재력을 키워주며 격려하는 일을 택하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희생하는 숭고한 마음과 강인한 의지와 신념과 실천하는 용기가 없이는 결단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주 목요일 새벽 조찬학습 모임에 가장 먼저 오셔서 한결같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회원들을 반갑게 챙겨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팔십 가까운 연세에 중국에서 개최하는 대학원 과정에 2년여 동안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신 학습열은 모든 사람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멘토와 스승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연구원을 운영하시면서 개인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공익 마인드로 정직하고 청렴하며 진실되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셨습니다. 이념이나 정치에 편향되지 않고 모든 분야의 저명한 많은 리더들과 교제하시면서도, 항상 겸손과 절제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하셔서, 가장 아름답고 끈끈한 인맥을 인간개발연구원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이타적이고 남을 먼저 섬기는 회장님의 훈훈한 성품은 회장님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신앙에 깊은 뿌리가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섬기는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셨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소망을 품고 끈기있게 성공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육신으로는 고단하셨지만, 영적으로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늘 함께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모두 마치셨으니 하나님 품 안에서 편안하게 영생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인간개발연구원과 남겨 놓으신 유업은 남은 자들이 회장님의 유지를 받들어 잘 이어갈 것입니다. 평생 회장님을 내조하시느라고 힘들게 사신 사모님과 장소영 상무를 비롯한 모든 유족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1년 1월 8일 이경숙 올림(전 숙명여대 총장)

 

 

■ 양병무 인간개발연구원 3대 원장

이렇게도 빨리 저희들의 곁을 떠나가시다니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과 충격을 누를 길이 없어 그저 야속한 하늘을 원망해 볼 뿐입니다. 회장님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철학으로 45년을 한결같이 달려 오셨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공부하는 경영자모임, 평생교육의 산실, 사회교육의 원조 등 회장님께서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과 성과는 필설로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당신이 희망입니다』라는 회장님의 자서전이 더욱 우리의 가슴에 사무침과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회장님은 1975년 온 세상이 “경제성장만이 살길이다”고 외칠 때 “좋은 사람, 좋은 세상(better people better world)”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인간개발연구원을 창립하셨습니다.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경영자교육에 몸과 마음과 청춘과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한 주도 쉬지 않고 새벽을 깨워 오셔서 기네스북에 오를 2031회의 경영자연구회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정부 고위관료와 외국의 저명 강사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 바로 경영자의 새벽 공부였다“며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곤 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기업인들도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일본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장만기 회장님과 기업인“이라며 존경과 감동을 전했습니다.

또한 회장님은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작되었을 때 교육 불모지 전남 장성군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한 교육의 꿈을 실현시키셨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주식회사 장성군』의 놀라운 혁신 사례를 보면서 ”혁신이라는 일이 성공할 수 있는 일이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었다“며 회장님께서 정부와 지자체 교육에 미친 영향력을 공무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격려하시기도 했습니다. 장성군의 교육 성공사례는 국제기록인증기관인 유럽연합 오피셜월드레코드(EU OWR)에서 ”세계 최장기간 사회교육의 메카“라는 공식적인 인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회장님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저명인사이셨습니다. 한일 관계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을 때 회장님은 일본의 정치 거물과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일 관계의 방향과 미래를 역설하시어 일본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중국에서도 정부와 대학에서 ”사회교육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비결을 알려달라는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회장님이 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이 ”사인해 달라“고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회장님은 회원들의 경조사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셔서 축하하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자신을 희생해 가시면서 바쁘게 사셨습니다. 회장님이 계시는 곳에서는 늘 사람, 웃음, 희망, 미래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45년 동안 교육을 일관되게 이끌어 오시는 과정은 경제적으로는 역경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교육사업은 그야말로 외화내빈이었습니다. 회장님은 자동차가 없이 걸어 다니면서도 ”11번 자가용 덕택에 건강하다“며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지난 45년 동안 가꾸어 오신 평생교육과 평생학습의 신념은 앞으로 다가올 45년, 100년을 넘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회장님은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시어 하루도 빼지 않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셨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어려움을 극복하시어 오늘의 금자탑을 쌓아 올리셨습니다.

회장님의 좋은 사람, 좋은 세상, 인간개발, 인간존중, 생명경외, 멘토링을 통한 인재육성의 철학은 인간개발연구원의 문용린 회장님과 한영섭 원장님을 비롯한 임직원과 남아 있는 분들이 실천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회장님의 빈 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집니다. 하나님도 회장님이 필요하셔서 이렇게도 일찍 하늘나라로 모시고 가셨다고 해석할 수밖에 달리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이제 무거운 짐 다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존경하는 장만기 회장님 영전에 옷깃을 여미며 올려드립니다.

2021년 1월 8일 .    인간개발연구원 3대 원장 양병무 올림

 

■ 오종남 (김앤장 고문, SC제일은행 이사회 의장)

고(故) 장만기 회장님을 보내며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하루 세 끼 밥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세계은행의 빈곤선 기준은 1인당 국민소득 '하루 1달러'다. (2015년 1.9달러로 상향)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406달러가 된 1973년에 빈곤을 퇴치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75년 2월 5일(목) 38세의 장만기 청년은 인간 개발을 위한 새벽 7시 조찬 모임을 시작했다.

'하루 세 끼 밥 먹는 문제'를 겨우 해결한 1975년에 그는 어떻게 인간 개발에 눈이 떴을까?

그의 답은 명쾌하다. "경제가 좋아지려면, 국가의 정책도 중요하지만, 기업을 운영하는 CEO의 능력이 절대적이라 생각했다. 경제의 주체는 기업이고, 기업의 리더는 CEO 아닌가? 그래서 CEO를 강하게 키워,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잘 키우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획기적인 기여를 한 '한국개발연구원(KDI=Korea Development Institute)'이 있다. KDI는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 수립 및 정책 입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정부가 1971년 3월에 설립한 국책 연구기관이다.

그로부터 4년 후 한 젊은이가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기업 CEO의 인간 개발이 필요하다며 '인간개발연구원(HDI=Human Development Institute)'을 설립한 것이다.

필자는 KDI와 HDI를 경제개발 연구와 인간개발 연구의 양대 축이라고 비교하곤 한다.

20년 후인 1995년에는 전남 장성군의 김흥식 군수와 손을 잡고 '장성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이는 상주시, 경주시, 서울 강서구 등 수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공무원과 민간인 대상 교육 사업을 시작하는 모델이 되었다.

최근에는 지도층에게 경제발전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문제에 대하여 배려와 섬김의 자세로 돌보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교육까지 확대하고 있다.

1월 7일 장만기 회장님께서 별세했다. 장만기 회장님을 보내며 그가 보여준 특이한 삶을 돌아본다. 누구든 장 회장님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기가 참 어렵다. 다음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분들을 알고 계실까?

끝으로 이토록 유명한 'HDI'의 설립자로서 왜 돈은 모으지 못했는지? 장 회장님은 이에 대한 답을 '3불'로 간단히 정리한다.

정치와 돈과 종교, 이 셋과는 얽매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살았다. 개인적 인간관계도, 인간개발연구원 같은 모임도, 정치나 돈이나 종교에 얽매이면 초심(初心)이 깨진다. 정치적으로 여당 야당, 좀 더 잘 하기 위해 필요한 돈, 그리고 첨예하게 대립하기 쉬운 종교, 이 셋과 얽매이지 않은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장만기 회장님은 우리 사회에 '조찬 문화'라는 유산을 남기고 떠났다. 유지를 받들어 생전에 꿈꾸었던 '인간개발'을 제대로 이어갈 것을 다짐하며 슬픔을 참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빈다.

오종남 (김앤장 고문, SC제일은행 이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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