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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서울특별시❷] 2021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세계 도시경쟁력 순위 경제 부문 20위, 종합 8위
[Special Report] [서울특별시❷] 2021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세계 도시경쟁력 순위 경제 부문 20위, 종합 8위
  • 이소영 기자
  • 승인 2021.02.01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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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폐허에서 세계일류 도시로 성장
1946년 제1대 김형민 시장부터 2020년 제37대 박원순 시장까지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한강에서 치맥과 라면 먹기' '이태원 프리돔' 강남스타일' 등 서울은 각종 리서치 조사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방문해보고 싶은 도시로 손꼽힐만큼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물론 집값상승, 인구 및 경제 과밀화 등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도로서 전 세계에서의 그 위상이 어느때보다 높아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 1950년 한국전쟁 폐허에서 세계일류 도시로 성장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다.

1일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등에 따르면 서울의 도시 역사는 백제의 수도로서 위례성이 서울 동남부의 한강변에 위치했던 약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후 오늘의 도시발전은 서울이 1394년 조선왕조(1392~1910)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도시지역이었던 사다문의 성곽 인과 성곽 밖 교외지역으로 이루어진 서울은 조선시대에 큰 변화 없이 약 20~30만 명 내외의 규모를 유지하였다.

[사진 = 서울시 제공]
[사진 = 서울시 제공]

 

서울은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전기, 철도, 전차, 공원, 상도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을 도입하면서 근대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일제강점기(1910~1945년)으로 이어졌고, 점차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불량 정착촌이 도시 곳곳에 형성되었고, 외곽지역이 급속히 편입되어 새로운 주거지로 변모해 나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시로 부르다가 1949년 8월15일 서울특별시로 개칭됐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은 다시 폐허가 되고 만다. 전쟁 동안 150만 서울 시민 중 11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정도로 서울의 피해는 막심했다. 1953년 9월 전쟁이 끝난 후에야 새로운 도시 건설에 주력할 수 있었고, 제분·제당·방적 등 원조 물자를 이용한 제조업이 제일 먼저 재생됐다.

서울의 인구는 1942년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고 성곽을 허물고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가 확장되어 나갔다. 해방 후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인구는 1968년 4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후 서울시는 국가의 경제성장과 함께 간선도로의 확장 및 연장, 청계고가도로 및 여의도 건설, 각종 도시 재개발, 무허가 정착지에 시민아파트 건설 등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1968년 전차를 걷어내고, 1974년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남북한 간의 긴장고조에 따라 서울의 도시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 서울의 경계부에 환상으로 설정됐다. 그리고 서울 강북지역의 도시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해 강남개발이 결정되었으며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어 신시가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후 인구유입이 지속됨에 따라 1963년 서울의 행정구역도 605㎢로 확장됐다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86서울아시안게임 개최, ’88서울올림픽 개최이다. 남북 분단 상황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으며 1970년 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전 세계에 뽐낼 수 있었다. 특히 88올림픽은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경합을 벌인 끝에 52:27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최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시기 적극적인 도시개선과 미화정책이 시행됐다. 잠실지역에 대규모 경기장들과 올림픽공원 및 선수촌 등 올림픽 관련시설의 대대적 건설, 한강의 종합개발계획과 한강변에 강변북로 및 올림픽대로의 건설, 강남지역의 개발에 따른 한강교량의 지속적 건설, 지하철 2,3,4호선의 연이은 개통, 도심부틔 재개발 및 주택 재개발이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또한 을지로와 테헤란로 도시설계에 의한 시가지의 정비 및 계획, 중산층의 폭발적인 주택수요에 대응한 강남, 목동, 고덕, 개포, 상계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도 서울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와 함께 1988년에는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들 1만달러를 넘어선 서울은 지하철 5~8호선을 추가로 건설했고, 고층건물들은 서울의 도심과 강남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았다. 그 이후 서울은 교외화와 광역화를 경험하면서 시가지가 경기도로 확산됐으며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의 5개 신도시화 함께 교외지역이 끊임없이 개발됐다.

100년 전 성곽도시였던 서울은 2000년대 현재 엄청난 거대도시로 성장했고 청계천이 복원되고 서울광장 및 광화문광장 등이 건설됐다. 또한 한양도성과 고궁들을 아우르는 역사도심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하고 있다. 용산과 삼성동, 잠실, 상암 등에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축물들의 건축이 논의되고 지하철 9호선과 신분당선의 광역급행노선이 건설됐으며, 중앙버스차로제가 도입되는 등 대중교통 체제가 개편됐다. 또한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서울도심과 부도심, 수도권 도시를 직접 연결하기 위한 광역급행노선이 검토되는 등 편리하고 신속한 대중교통체계를 공급하려 하고 있다.

서울은 20세기 중반 들어 오늘날의 발전을 시작하였지만 서구의 런던과 뉴욕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수백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고, 이웃한 도쿄도 이미 100만명을 훨씬 넘긴 대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은 20세기 후반 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이들 도시보다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성장했다.

# 세계 도시경쟁력 순위 경제 부문 20위, 종합 8위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2021년 서울은 전 세계 주요 도시경쟁력 평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 모리사가 지난해 말 발표한 세계 도시 종합경쟁력 순위(Global Power City Index 2020·GPCI)'에 따르면 서울은 8위에 올랐다. 2017년까지 6년 연속 6위에 올랐지만 2018년 이후 순위가 밀려 2019년에는 7위, 2020년에는 8위까지 하락했다. 1~2위는 런던과 뉴욕으로 9년째 선두권을 유지했다. 도쿄와 파리도 5년째 3~4위를 유지했고, 싱가포르도 2011년 이후 줄곧 5위에 올라있다. 서울은 최근 부동산 가격 인상 등의 이유로 인해 다소 순위가 밀리기는 했지만, 전쟁으로 황폐화가 된 국가의 수도가 전세계 주요 도시 10위권 안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계도시종합경쟁력 순위는 모리재단이 2008년부터 매년 조사·발표하는 연차 보고서다. 경제, 연구·개발, 문화·교류, 주거, 환경, 교통·접근성 등 6가지 항목에 70개 지표를 적용해 종합경쟁력을 평가하고 있다.

6가지 조사항목을 모두 합한 종합점수에서 서울은 1163.1점을 받아 7위였던 지난해보다 42.5점이 떨어졌다. 항목 별로는 경제 20위(224.5점), 연구·개발(R&D) 6위(132.0점), 문화·교류 11위(158.8점), 주거 39위(300.5점), 환경 15위(165.점), 교통·접근성 12위(181.9점)였다. 48개 도시 가운데 39위를 차지한 주거가 서울의 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렸음을 알 수 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됐던 2020년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서울사의 좋은 점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드라이브·워킹스루 진료소'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1996년 세종로와 광화문
1996년 세종로와 광화문[사진 = 픽사베이 제공]

 

서울시는 지난해 11월 30일부터 12월 9일까지 열흘간 서울시 6개 언어 외국어 홈페이지에 온라인 투표 페이지를 개설해 ‘코로나 시대, 서울시 우수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총 9681명의 외국인이 투표에 참여해 서울시 주요 정책 15개 중 선호하는 3개의 정책에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결과 드라이브스루·워킹스루 선별진료소가 4137건(14.2%)으로 가장 득표를 받았다. 이어 서울 거주 외국인이 코로나19의 정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8개 국어로 지원하는 외국인 코로나19 지원센터(3417건·11.8%), 코로나19 클린존 인증(2960건·10.2%) 등의 순으로 선정됐다. 언어권별로 보면 드라이브스루, 워킹스루 선별진료소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중어권(중국, 홍콩, 대만 등)에서는 ‘대중교통 방역 시행’이 일어권에서는 ‘마스크 착용 의무화 캠페인’이 순위권에 포함됐다. 스페인어와 불어권에서는 ‘잠시멈춤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도 많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1946년 제1대 김형민 시장부터 2020년 제37대 박원순 시장까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특별시 시장은 인구 규모만큼 국정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정치적 의미가 상당히 큰 자리다.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차관급으로 대우받는 것에 비해 서울특별시장만 유일하게 장관급으로 대우를 받으며 국무회의에도 배석한다. 단 발언권은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일반적인 지방자치법에 적용 뿐 아니라 특례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법과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을 통해 일부 특례를 적용받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역대 시장은 1946년 제1대 김형민 시장부터 박원순 시장까지 총 37명(권한대행 제외)이다. 초대부터 29대까지는 11대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선출직이 아닌 관선직이었다. 30대 시장으로 선출된 조순 시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민선 시장 시대가 열렸고, 37대 박원순 시장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지난해 박 시장의 작고로 현재 서정협 행정1부시장이 권한대행직을 수행중이다.

해방 후 초대 시장을 맡은 김형민 시장은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전재민 수용계획 수립 추진했다. 남산동 일본인 여관 13동을 수용수로 활용하는 한편 요정, 사찰, 빈집 등을 개방해 전재민을 수용했다.

제2대 서울시장인 윤보선은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했으며,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했다.

민선 시장 선출로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 있는 제 30대 서울시장 조순은 시정을 시민중심으로 전환하고 시정운영 3개년 계획과 부문별 중장기 계획 수립 추진했다. 이외에 환경기본조례제정, 환경헌장 제정. 서울의제 21 등 환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제 32대 서울시장은 이명박이다. 서울시장 이력을 발판 삼아 대권에 도전해 제17대 대통령을 지냈다. 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 생태하천 복원, 서울숲 조성 등 친환경시정 추진했으며 대중교통체계 전면 개편으로 빠르고 편리한 서울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3, 34대 시장은 오세훈이다. 120다산콜센터, 천만상상오아시스를 비롯해 WDC 2010 유치, 동대문디자인파크플라자 건설 등 디자인서울 정책 추진했다. 금융·관광 인프라 조성, 외국인 편의시설 확충으로 서울 도시경쟁력 세계9위로 신장했다는 평가다.

35~37대까지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친환경 무상급식 추진, 시민복지기준 정립 등 보편적 복지 초석 마련했다. 또한 마을공동체,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등 글로벌 사회혁신도시 기반을 구축했다. 서울로 7017, 문화비축기지 등 조성으로 도시개발에서 도시재생으로 패러다임 전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추진, 국공립어린이집 확충, 아파트 관리비 혁신 등으로 시민 삶의 질을 높이는 시정 실현했다는 평가다.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사진 = 픽사베이 제공] 특정기사와 직접관련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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