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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이종천 회장 “올해 수교 60주년을 계기로 양국간 동반자 관계 공고히 해야"
[특별기고] (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이종천 회장 “올해 수교 60주년을 계기로 양국간 동반자 관계 공고히 해야"
  • 박가희 기자
  • 승인 2022.05.03 0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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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서울에서 열린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사진=(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제공]​​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에서 이종천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제공]​​

 

■ 외교관으로 인연 맺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첫 인상

사우디아라비아 하면 생각나는 노래 가사 ‘아시나요’. 근로자와 가족들의 애창가.

“안녕하며 돌아서는 그대 두 눈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 나는 보았네. 가며는 아니 오고 모른 체 잊는 것은 아니지만 길면 3년 짧으면 1년 잠깐만 당신 곁을 떠나 있는 것이라오. 그리워도 참고 살아요 아 돌아갈 그날까지”

 

2001년 당시 필자는 54살의 나이에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대사관에 외교관으로 부임해 먼저 오랫동안 사우디에 계신 분들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교민회 간부들은 선배들이 신입생에게 학교 생활을 안내하듯 나에게 사우디 생활의 비결에 대해 이것 저것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이분들 중에는 중동 붐을 현장에서 경험하신 분들이 많았다.

이분들의 이야기는 군대를 다녀온 분들의 군생활을 듣는 것처럼 즐거웠다. 기억에 남는 조언은 “노후를 사우디에 보내면 좋다”, “사막에 사는 사람은 관절염 환자가 없다” 그리고 여기는 “서울에서 잘 난 척하는 놈들 안 봐서 좋다”고 했다.

1970년대 대기업의 사우디 건설회사 현장 소장으로 퇴직한 분은 사우디가 정이 들어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사우디 와서 3년만 있다가 서울 간다고 하다가 어느덧 30년을 살고 있다고 했다.

과거 왕정 국가에서 살던 한국인으로서는 지금도 왕정국가에 사는 아라비아인의 생활 풍습, 음식 정서를 공유할 수 있고, 모래 바람, 사막 골프가 좋다고 하며, 이것이 사우디 생활이라고 했다.

1970년대 사우디 생활을 하신 분들은 고유가로 사우디 경기가 좋아, “대사관 사람들은 뇌물을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었고, 건설회사 소장 들은 매일 화투 치다가 팔 떨어져 죽었다”. “리야드 시장에 가면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 고향 생각을 모두 잊었다”고 했다.

 

​2014년 서울에서 열린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사진=(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제공]​​
​서울에서 열린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사진=(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제공]​​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매일 사우디 동부지역 다란 공항에 서울에서 대형 점보기 2대가 한국 근로자들을 태우고 왔다고 한다. 중동 붐 기간 사우디 경제가 좋았고, 교민들도 매일 새로운 서울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 좋았다고 했다. 1983년까지는 젯다에 각국 공관이 있었고, 1985년에 리야드로 모든 대사관을 이전했다.

리야드 교민들은 나와 비슷한 연배, 한국 전쟁(1950년-1953년) 이전 출생한 세대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월남에서 파병 군인으로 혹은 사업가로 살다가 중동 시장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오신 분들이 많다. 한국 전쟁 이전 세대들은 대부분 월남전(1960년-1975년)이 끝나고 이란을 거쳐 사우디에 왔다고 한다. 그 당시 월남 파병 병사의 급여는 57달러, 80%는 고국 가족으로 송금되어, 본인은 12달러만 받았다 한다. 해외에서 달러 월급을 받던 분들은 사우디 생활 정착을 쉽게 하는 것 같았다.

대사관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이슬람 문화, 사우디의 특성을 글로 남길 수가 없다. 이슬람 율법이 엄격한 사우디에서 특히 공직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일반적인 지식이라도 출처가 “공직자가 말했다”라고 하면 문제가 될 수가 있다.

해외여행에서나 평소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사소한 사실이 라도 글로 남기는 일본인도 사우디 생활을 책으로 남기지 않아, 서울에서 사우디를 알 수가 없었고, 사우디는 현장에 와야 알 수가 있었다. 세월이 좋아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우디를 대충 알 수는 있다.

내가 만난 많은 지식인들은 “20세기에 한국의 국가 운은 아주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 한국 전쟁 발발(1950년 6월 25일)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된 것도, 1950년 6월 27일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 소련 대표가 불참해 파병이 결정되었다. 내가 유고슬라비아 한국 대사관에 근무(1995년-1998년) 할 때 베오그라드 국제 문제 편집장 Ranko 박사는 유엔군 참전 표결 당시 안보리 이사회 의장국은 주미 유고 대사였는데, 유고 대사는 이념이 같은 소련과의 외교 관계에도 유엔군의 한국 파병 결정에 협조를 했다고 했다.

한국인의 중동, 사우디 진출도 시기적으로 한국에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월남전쟁(1964년9월 - 1973년 3월)에 참전한 한국 병력은 9년간 35만명, 파병 장병들이 제대 시기를 전후하여 중동 산유국에서 건설 붐이 있었다. 제1차 오일 쇼크로 1973년에 석유 가격이 배럴당 3.5달러에서 10달러로, 2차 오일쇼크 때인 1979년에 15달러에서 39.5달로로 급등하여, 사막 땅 중동 산유 국가에서 대대적인 국가 건설 붐이 있었다.

한국 건설 업체가 그 당시 사우디에만 70여개 업체가 진출, 건설 근로자들은 매년 20만명이 사우디 현장에 필요하여, 월남전 제대 장병들은 쉽게 일자리를 찾아 중동으로 왔다.

 

■ 아라비아 상인과 한반도 그리고 이슬람

 

사우디 알울라 [사진=(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제공]​​
사우디 알울라 [사진=(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제공]​​

 

 

아라비아는 역사적으로 찬란한 문명과 종교(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발상지로 인종, 기후도 다르다. 열대성 더운 기후이나 눈이 내리는 지역도 있다.

아라비아 상인의 문화 특성은 개방성(Openness), 다양성(Diversity), 역동성(Dynamism)이다. 아라비아 상인이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북부에 걸쳐 무역 활동을 하던 이슬람 상인을 말한다. 한반도에도 오가면서 무역을 했는데, 특히 고려 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아라비아 상인은 유목민 정신(Nomad Sprit, 혁신: Novatus)을 가지고 있다. 유목민에게는 공정한 경쟁이 중요하며, 유목민 역사는 ‘도전과 개척’의 연속이다.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아라비아인(Arabia人)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다. 초기 아랍인은 대부분 사막의 유목민이었으나, 현대 유목민은 아랍 인구의 5%에 불과하다.

5세기부터 신라에 도착한 아라비아인들은 신라는 비단, 검, 사향을, 아랍은 향료, 유리 기구 등을 교환했다. 아라비아인들은 신라를 “전염병이 없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이 순박하며, 자연이 아름답다”며 이슬람 세계에 “불멸의 땅으로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이상향의 국가로 소개”하였다.

이때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이 신라를 Al-Shila, Kaoli라고 불러 한국을 Korea로 하게 되었다. (이슬람 학자 Rashid Al-Dan, 1247년-1318년)

7세기 나-당 연합으로 패망한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 유민 35만명이 당나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다. 당나라는 이들 노예를 군인으로 전쟁터에 참전하도록 강제를 하여, 많은 전쟁터에서 승리를 했으나, 이슬람 제국과 당나라의 Talas전투(751년)에 참전해서는 당나라가 패배하였다.

전승한 신생 압바스 왕조(750년-1258년)의 이슬람 제국은 Talas 전쟁 포로들에게 “이슬람을 믿으면 자유인으로 석방”하겠다 하여, 한민족이 중앙아시아에 살게 되었다.

이들은 지금의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에 살다가 당시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경유하여, 아시아로 오는 제다항으로, 한민족 후손들이 아라비아 상인이 되어 인도양을 경유하여 아시아, 인도, 중국, 베트남에 정착하게 되었고, 일부는 한반도로 귀향을 한 것으로 추정 된다.

이러한 교류 역사는 아랍 세계에 최초로 한반도를 소개한 아라비아 상인 술래이만의 ‘중국과 인도 소식’ 여행기(851년)에 있다.

신라 해상 왕 장보고(790-846년)는 바닷길로 아라비아 상인과 교류를 했다. 신라 말 9세기에서 고려 초 10세기에는 벽란도에 4만에서 7만에 이르는 외국인이 모여 살았고, 대부분은 이슬람 상인들이었다 한다. 11세기 고려 현종 1024년에는 이슬람 상인 10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5년에 100명, 1027년에 100명이 입국 방물을 바쳤는데, 이중에는 고려에 귀화한 사람도 많았다 한다.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여 세운 원나라(1271-1368년)는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에 도움을 준 색목인(주로 중앙아시아 이슬람인)을 관리로 100만명을 채용하였다. 아마 중앙아시아에 살던 백제나 고구려의 후손들은 이슬람인으로 살았지만, 조상들이 죽기전에 너희들 고향은 한반도라고 하였을 것이고, 마침 신생 원나라가 고향 가까운 중국을 지배하며 이슬람인들을 관리로 채용하여 많은 한민족 후손들이 원나라로 이주를 했을 것이며, 고향으로 돌아온 후손들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과 결혼을 하면서 따라온 시종이 고려인으로 귀화하여, 왕이 이름을 장순용으로 하사(1275년)하여 지금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덕수 장씨 후손들은 10만명이 된다

이러한 역사 사료로 보아 지금은 한반도에 아라비아 후손들이 많은 것으로 짐작한다.

 

 

■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사)한국-사우디 친선협회

 

​나우프미술전 [사진=(사)한국-사우디친선협회 제공]​
​나우프미술전 [사진=(사)한국-사우디친선협회 제공]​

 

 

요르단 대사관(1990-1993년)에 이어 사우디 대사관(2001-2004년)에서 근무한 6년여 기간에 중동과 이슬람 문화를 많이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사우디인들은 한국과 사우디간 역사적인 인연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주 친근하게 형제 관계로 우대를 해 주었다.

부임 인사차 만난 정보기관 간부는 나에게 예멘의 남북 전쟁에 한국의 지원에 감사를 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왜 그런 인사를 받았는지 모르고 있다.

사우디에 근무하면서 겸임 지역으로 예멘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예멘 정부 인사들도 한국을 잘 알고 좋아했다. 외교관으로 양국 친선 증진 차원에서 한국에서 아랍어학과를 개설한 조선대학교에 예멘 살례 대통령에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하도록 주선했다. 예멘 대통령에 명예박사학위 수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단법인)한국-사우디친선협회의 설립 목적은 “양국 상호이해와 우호증진”이다. 협회 활동으로 사우디 주요 인사에 명예 박사학위를 주려고 한다. 한국을 좋아하고 양국 발전에 기여하는 주재국 인사들에게 명예박사 학위 수여는 장기적인 양국 교류에 큰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며 주요 친선 민간 외교활동이라 생각한다.

주한 사우디 대사관에 부임하는 젊은 외교관들에게 한국에 근무를 하는 기간에 한국 대학에서 학위 공부를 하도록 권하고, 한국 대학 교수들에게는 한국을 잘 아는 외교관들을 많이 배출하도록 지도를 당부하며 고와주고 있다. 한국 외국어대학과 명지대학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GCC국가 외교관들은 많다.

그런데 한국 대학은 외국인 학위수여에 대해 잘못된 인식에 가지고 있어 소개를 하려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공개를 하고자 한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우디에 근무하며 알게 된 한국기업 파트너로 한국을 잘 아는 사우디 왕자 기업인에 친선 활동 차원으로, A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를 주기로 한국 대학 총장의 공식 서한을 받고, 학위 수여식은 6-12개월후에 수여하기로 하였는데, 그 사이 대학원장이 교체되어, 신임 대학원장이 사우디 왕자가 A대학교에 학교 건물 신축 등 기부 없이는 학위 수여를 못하겠다 했다. 대학 총장의 학위수여 약속이 대학원장 교체로 이루어 지지 못한 한국 대학 학사 행정에 재검토를 기대 한다.

대사관에 근무하며 알게 된 1970년대 한국 근로자 사우디 진출을 도운 사우디 기업인이 있다. 중동 붐 기간 사우디 진출 한국 근로자 비자 주선 사업으로 큰 돈을 번 기업인으로, 리야드에 백화점과 리야드 주변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주요 인사가 리야드를 방문하거나, 대사관에 신규 직원 환영과 송별 기회가 있으면, 농장에 초대하여 사우디 음식을 대접하는 고마운 친한 기업인이다.

팔레스타인 출신 Mohammed Al Othman(88세로 별세), 오스만(Othman) 박사는 Adnan Khashoggi (1935. 7. 25 출생, 1970〜80년대 전 세계 무기 시장을 주름잡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 거래상으로, 2017년 6월 6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와 사업을 하며 자가용 비행기를 소유한 부자로, 사우디 진출 한국 기업(한양건설, 한일건설)을 도와준 기업인이다. 오스만은 한국 기업 지원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 격려를 받았다.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등 주요 인사들과 친분으로, 서울시에서 명예 시민증을, 한양대, 인하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스만은 서울에 올 때마다 박종규 실장 등 아는 분들의 묘소도 참배하는 친한 인사이다

나는 오스만 박사가 사우디 진출 한국기업을 잘 지도해 달라고 하며 각별하게 대접을 했다. 어느 날 오스만이 내 학위 논문을 보고 자기가 아랍어로 번역하여 한국과 사우디에 배포하자고 했다. 하지만 번역과 출판에 어려움이 많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고맙기는 하나 사양하겠다 했다. 그러나 사우디인들은 남에게 기부하는 것을 명예스러운 일로 생각한다해, 내가 고맙다는 공문을 주며 번역과 책자 발행을 요청했다. 신뢰가 중요하지만 사우디에 오래 사신 분들은 아라비아 상인들과 교류는 어렵다며 반드시 문서로 남기고 기부 도움을 받도록 조언을 하여 수시로 감사하다고 편지를 보냈다.

오스만은 내가 소개한 모든 한국 기업인들에게 사우디인과 기업과의 거래 형태에는, 반드시 문서로 남기라고 했다. 작은 계약이나 구두 약속이라도 반드시 서류로 근거를 남기라고 했다. 한국인들의 철저하지 못한 사업 형태를 지적했다. 팔레스타인 국민으로 사우디에 와서 큰 부자가 된 사례는 거의 없다고 했다. 인종 차별의 사례이다.

나는 책이 나올 때까지 여러 차례 대사관 문서로 영문 박사학위 책자를 아랍어로 번역, 책 발간, 배달 기부에 감사하다는 서한을 보냈다. 3년만에 아랍어로 책 번역, 인쇄, 레바논에서 리야드 대사관으로 우편 배송 하였다. 5000권 번역과 인쇄, 국제우편배송 등에 5만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책자가 리야드 대사관에 도착할 시점은 이라크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마침 이라크 전쟁이후 주변국 사우디를 방문한 한국 아랍어 학과 교수들로 구성된 학술 연구 교수단 (5명)이 대사관을 방문하여 내가 ‘순수사회주의 붕괴 이후 북한’ 제하의 아랍어 책자를 선물했다. 교수들은 아랍어 교수로 자신들이 부끄럽다며,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논문을 사우디인이 자비로 발간을 지원한 사례는 처음이라고 하며, 이 책자를 축하는 기념으로 한국-사우디 친선협회를 설립하자고 했다.

Euro Marsh 백화점을 경영하는 오스만 회장은 자택에서 발기인 대회를 하자고 하여, 외국어대, 명지대, 단국대 교수 5명과 대사관 직원과 함께 Korea Saudi Friendship Society를 설립하기로 하고, 협회 설립 행정사항은 회장으로 추대된 내가 하기로 했다.

내가 귀국을 앞두고 아랍어 책자 5000권을 받아 주 사우디 한국 대사관, 제다 총영사관, 리야드, 담만, 제다 교민회에 300권씩 전달하였다. 그리고 500권은 리야드 KSU 대학 교수들과 정부 부처 주요인사에 선물로 주고, 대사관 영사과에 비치하여 교민들이 사우디 스폰서(Sponsor)에 한국을 알리는 선물로, 그리고 대사관 방문 사우디 인사들에게 배포를 하도록 하고, 3000권을 서울에 가지고 와서, 자비로 한국 전국 대학 도서관, 국회 도서관에 배포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2014년10월29-31일)참석자들에게 사우디에 관심을 가지도록 3일간 회의장 입구에 책을 두고 가져 가도록 했다.

2004년 귀국을 앞두고 정부인사, 대학교수, 교민 간부들에 그간의 협조에 감사드리며, 귀국 인사를 했다. 사우디 대학 교수들은 나에게 “외교관도 했고, 북한 연구 정치학 박사 학위도 있고, 더욱이 공산권 국가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 사우디에서 북한 이해 아랍어 책자는 아주 의미가 있다”면 앞으로 한국에서 양국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언론인과 정부 관료 지식인들도 “한국이 이제는 사우디에서 돈만 벌게 아니라 문화 교류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그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했다.

“일부는 한국인이 사우디를 돈으로 본다. 중동 붐 기간 많은 한국 기업이 사우디에 진출하였으나, 유가 하락으로 사우디가 어려우면 한국인이 급속히 귀국하여 아쉽다”고 했다. 외교관 신분인 나에게 비록 사우디 지식인이 나와 친분이 있다고 하는 말이라 믿기에는 자존심이 발동했다.

이러한 사우디 지식인의 요청을 오스만박사에 전하니, 내가 돈을 지원할 테니 협회를 설립하라고 격려했다. 서울에 와서 정관 작성, 법원 등기 등 모든 행정수속을 나 혼자 했다.

2004년6월11일 외교부 허가 제445호로 설립을 했다. 서울에서 활동중인 NPO, NGO단체인 한국 사우디 친선협회(KSFS)에 많은 격려 바랍니다.

 

■ KSFS 설립 이후 18년간 활동 및 면담 주요 인사(사우디인과 한국인)

 

 

2014년 서울에서 열린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사진=(사)한국-사우디친선협회 제공]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에서 이종천 회장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사)한국-사우디친선협회 제공]

 

 

‘한인들 사우디 진출사’ 원고 요청을 받고, 공직 생활로 사우디에 갔는데 글을 남기다는 게, 개인 자랑이 될 수도 있고 불필요한 오해를 살수도 있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비행기로 9시간이 걸리는 먼 나라 사우디 땅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미래 학자들이 말하는 “10년후 세계의 부는 열대 지역 아프리카와 인도로 이동 한다”하여, 앞으로 사우디 아라비아가 기회의 땅에 될 것이므로 후배들 진출에 도움이 되고, 이슬람 국가 종주국 사우디 이해는 이슬람 시장 개척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글을 남기고자 한다.

2004년6월 협회 설립 등기 절차를 마치고, 서울과 리야드에서 한국과 사우디 친선 협회(KSFS) 설립을 언론(아랍뉴스와 조선일보 등)에 인터뷰와 광고 기사로 홍보하였다.

리야드에서 최대 스포츠 사업을 하는 선경 파트너 Thehaiban Fahad Al-Thehaiban 형제는 내가 친선 협회를 설립했다고 하니, 아들도 발전하는 한국에 유학을 보낼 것이라며, 협회 운영을 돕겠다 하여 내가 자립으로 3년간 운영 하다가 어려우면 그때 도와 달라고 하며 정중히 사양했다.

사우디인들은 매일 5번 기도와 라마단을 철저히 준수하는 종교인들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는 국민들이다. “비영리 친선 민간단체에 자선과 기부를 의무로 알고 있어, 우리도 배워야 한다”고 소개하고 싶다.

서울에서는 사우디 ARAMCO 투자 기업 S-OIL 대표를 예방 (2005년6월24일)하여 협회 설립과 활동을 소개했다. 리야드 교민회장이 사우디 프로 축구팀이 서울에 가니 응원을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S-OIL CEO에 직원들이 사우디팀 응원을 하도록 부탁을 했다. S-OIL CEO는 직원들이 바빠 응원을 하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이슬람의 한국 진출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국내 종교 단체도 있어 완곡한 거절로 이해했다.

한국과 사우디 프로 축구팀 상호 경기는 FIFA가 입장료를 관리하여 표가 비싸 협회는 응원 인원 모집이 어려웠다. 인사차 만난 S-OIL CEO Ahmad Al Arnaout(1947년생)는 나와 동갑이라며, 부임2년이 지나, 재혼한 어린 아들과 함께 지방 구경도 가고, 서울 생활을 즐기고 있다며 지방 명승지 안내 구경을 같이 가자고 했다.

재임기간이 앞으로 2년 남아 있다며 재임 기간 중에 한국 사우디 친선협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 대화 한시간이 지나서는 사우디는 데모가 없어 기업하기 좋은데, 데모가 많은 한국에서 친 사우디 KSFS가 있어 고맙다. “내가 CEO로 있는 한 KSFS를 적극 돕겠다. 조용한 기부를 하고 싶다. 자신의 모바일로 직접 연락을 해 달라”하며 모바일 번호를 주었다.

8세기 Talas전투(751년)에서 포로가 된 한민족들에게 이슬람 국가에 살도록 한 이슬람 제국의 후손 사우디 아라비아, 20 세기 “중동 붐” 기간 한국 전쟁으로 가난했던 한국인이 잘 살도록 한국 근로자와 한국 기업이 사우디에 가장 많이 진출을 하도록 도와준 사우디정부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협회 회장으로서는, 한국에 진출한 사우디 기업들이 사업을 잘 하도록 도울 것이다.

CEO는 코란을 선물하며,

To my friend Dr. Lee, Jong Cheon.

I hope this humble gift may give you some insight in our great religion.

Sincerely

Ahmad Al Arnaout.

Ahmad CEO는 축구 경기에 참석, 응원을 못한다며 입장 축구표와 대회 응원 준비를 하라며 기부금을 보냈다. 기부 영수증을 보내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신문,방송 등 언론에 S-OIL CEO가 급성 심장경색 삼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후로 나는 후임자 부임에도, S-OIL CEO 사무실을 방문하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내가 귀한 친구 사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근신하는 마음으로 자숙하고 있다. CEO가 선물한 코란은 내가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

협회 설립 이후 3년간 한국의 한 매체에 사우디 소개 기사를 시리즈로 썼다.

2007년 협회 홈페이지(www.koreasaudi.com)를 개설, 사우디를 공개적으로 홍보했다. 조선일보 강당에서 ‘세계 속에 중동, 사우디 아라비아’ 소개 세미나(2006년 4월 26일)를 개최했다. 연사는 조선일보 주미 특파원, 오스만 박사, KSFS 회장이 연사로 사우디를 소개했다.

많은 기업들이 참가비가 얼마이냐고 물었다. 무료라고 하니, 앞으로는 유료 세미나를 해야 기업인들이 많이 참가한다고 팁을 주었다.

2007년 문화교류 차원에서 사우디 미술가 5명을 서울에 초청, 미술전시회를 개최(5월10일-18일)하였다. 사우디 개인 갤러리 운영 공주 미술가 Nauf를 비롯 사우디 미술협회장 Sameer, 여성 미술가 2명과 남성 미술가 2명 등 6명의 작품 35점을 전시했고, 개막식에는 22개국 전 중동 대사와 4강 대사, 국내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했는데, 전원이 참석하였다. 아마 한국에서 처음 전시하는 사우디 미술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것으로 이해한다. 조선일보는 ‘아라비아 공주의 서울 나들이’ 인터뷰 기사(5월10일)로 홍보를 하였고, Korea Herald, KTX Magazine 등 국내 다수 언론에서 전시회 홍보를 하여, 전시회 방문자는 9일간 600여명이 방문하였다.

협회는 25살 어린 공주가 개인 수행원 3명을 데리고 서울을 방문, 조선 호텔에 투숙, 신변안전을 경찰에 특별 요청하였는데, 협회 허락 없이 공주를 만나지 못하도록 당부를 했는데도 어떻게 만났는지 공주에 한복 등 많은 선물을 준 한국인 기업인들 때문에 귀국시에 짐이 많아 대사관이 도움을 주었다. 사우디 공주가 왔다고 신문에 보도가 되어, 사우디 공주는 부자 나라 딸이라 친분을 쌓아 두면 향후 사우디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무튼 한국인의 적극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우디와 수교(1962년10월16일) 이후 한국인이 사우디에 가려면 사우디에서 초청장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일반인의 사우디 관광은 어려웠다.

한국은 1980년초부터 부유층을 선두로 차차 해외여행의 문화가 개방되었다. 한국정부의 완전 해외여행 자유화는 1989년이다.

사우디와 교류, 관광 증진을 위해 사우디 관광청을 수시 방문, 한국에 사우디 관광청 개설을 공식 요청하여, 사우디 관광 청장(H.R.H Fahd)으로 부터 특별 지원, “사우디가 해외에 관광청 지사를 개설하면 한국이 최우선 개설하도록 하겠다”는 공한을 받았다. (2008년7월1일)

COVID 19가 종식되어 여행이 재개가 되면 사우디 정부에서 KSFS에 관광 사업을 하도록 특별 배려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협회는 민간차원의 관광 사업 증진을 위해 사우디 관광청(SCTA)추천 사우디 최대 AL-Tayyar CEO Nasser와 관광 교류 MOU를 체결하였다. (2008년3월18일)

Nasser CEO는 자신의 할머니가 한국계라 했다. 한민족이 언제 사우디까지 가서 후손을 키웠는지는 그 후 확인을 하려 했으나, 관광 사업이 사우디측 사정으로 진행이 안된고 해 기다리다, 이제는 코로나로 계속 연기가 되고 있다.

사우디 미술 전시회 서울 개최 조선일보 기사 덕분에 천진에서 호텔을 운영하시던 전 관광공사 부사장 김종칠 회장이 사우디를 잘 아는 분이 북경에서 사업을 한다고 소개하겠다 하여 천진을 경유 북경에 갔다. 사우디에서 30년 정주영 회장을 모신 김 회장의 소개로 현대건설 사우디 Sponsor Otaishan Midco 회장을 사우디에 만났다.

주바일 항만공사 당시 세계 최대 9억6000만달러 공사를 완공(1976년-1979년)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사우디가 존경하는 최고의 기업인이다. 정주영 회장은 당시 박정의 대통령에 “사우디는 비가 오지 않아 공기 단축이 가능하다” 하여 한국인에게 사우디 진출에 자신감을 준 큰 사건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2001년3월21일 별세했다.

사우디는 외국인이나 기업에 대해 사우디에 거주를 하거나 사업을 하려면 사우디인을 Sponsor로 지정하여, 사업이나 활동은 Sponsor 명의로 해야 하는 제도이다. 사우디 진출이나 생활은 능력이 있고 진실한 사우디인을 Sponsor로 지정을 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 정주영 회장은 사람을 물색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한다.

Otaishan은 기획재정부(MEP) 퇴직 직원으로 트럭 사업을 했다. 그는 초대 국왕의 아들로 그 당시 왕위 계승이 가능한 압둘라 왕자의 처남이었다. 압둘라 왕자는 1982년 왕세자가 되었고, 2005년 국왕으로 즉위하여 2015년 타계했다. 사우디에 가면 나는 Otaishan Midco 회장을 자주 만났다. 담맘 해변가 별장에 초청을 받아(2008년1월12-13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오타이샨 회장은 압둘라 국왕을 월1회 정도 만난다며, 국왕을 만날 때 양국 발전에 도움이 되는 대화 자료를 달라고 했다.

Look East Strategy를 창시한 압둘라 국왕의 아시아 정책 성공을 위해, 서울에 병원과 학교 설립을 권했다. 기독교도 한국에 진출할 때 대학과 병원을 설립, 구제 활동을 했다고 설명하며 자료를 전달했다.

Midco회장에게 협회에 기부를 하라고 하니, 정주영 회장이 별세하였으니 자신과 사업을 같이 하자고 권했다. 나는 공직 생활만 하여 사업을 할 줄도 모르고, 협회 운영만 하겠다 하니, 정주영과 같은 좋은 기업인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전문 경영인이 현대를 운영하는 시대 변화로 인해, 전권을 가지고 기업을 운영한 정주영과 같은 분을 지금은 찾을 수가 없고, 협회 회장 자격으로 기업인 소개는 어렵다고 거절을 했다.

Otaishan이 평가하는 정주영 회장은 “사업 협상을 할 때 반드시 준비한 자료를 읽고 자신 있게 말한다” 자료 없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책임감을 보여주는 협상을 한다고 했다. “정 주영 회장을 존경하고, 회장님과 약속한 사항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지킬 것이다”고 했다. 인근 국가에 어린 부인 4명을 두고 활기찬 삶을 사신 분인데 자동차 사고로 별세했다. 2022년 고인이 된 오타이샨은 죽을 때까지 현대건설 성장에 도움을 주었고 한국을 좋아했다. 삼성병원에 무릎 치료차 왔다가 치료 경과가 좋다며 술 먹으러 가자고 조르는 어린 아이처럼 순진한 청년으로 평생을 살다 갔다.

Otaishan 소개로 알둘라 국왕 고문 Dr. S를 만났다. 미국에서 정치학 공부를 하고 담맘 UPM 대학 교수를 지낸 학자이다. 한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을 했고, 중국과도 친분이 많은 학자이다. 20여년간 국왕을 모신 Dr. S는 “한국은 북한이 있어 성장했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기 때문에 긴장된 삶이 국가 안보에 필요하고, 국가 성장에도 필요하다”고 하며 협회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했다.

Dr. S는 협회 설립 10년이 되는 2014년에 서울에서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개최를 권하며, 포럼에 관련된 사우디측 행정 사항을 지원 했다. 사우디의 포럼 후원 창구는 Royal Court와 MCI(Ministry of Commerce and Industry)와 CSC(사우디 연합상공회의소)가 했고, 한국은 KSFS가 포럼을 주관했다. Dr. S는 나보다 한 살 위로 형처럼 국왕 번역상(2009년5월24-29일) 한국인 추천 수상(명지대 최 영길 교수), 2014년 서울 포럼 개최, KACST(사우디 왕실 과학 기술원) 주관 IP Bank Workshop 사우디 개최(2012년9월15-17일)등을 도와 주었다.

그 때 KACST부총재는 이제는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 “한국의 기술과 사우디 자본이 협력하면 우리 양국은 5년 이내에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가 있다” KSFS가 역할을 해 달라고 했다.

Dr. Zamil, 작고한 Zamil 그룹 회장으로 사우디 연합 상공회의소(CSC) 회장을 지내고, 서울 포럼에 사우디 기업을 대표 하여 경제장관 5명과 박근혜 전 대통령도 예방했다. 사우디10대 재벌 회장으로 Zamil 회장은 한국 사우디 친선 협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KSFS 창립 발기인이 납부한 금액을 자신도 내겠다 했다.

Zamil 회장은 사우디 진출 한국 기업의 철강 자재를 사우디에서 구매하도록 해달라고 하여, 대사관과 협의를 했으나, 민간 기업들은 가격과 품질을 판단하여 서울에서 자재를 가져온다고 설명하고 기업자재 구매는 기업이 시장 가격으로 결정을 하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상공 차관 출신 Zamil 회장은 원전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무실을 줄 테니 한국, 미국, 사우디 3국 협력으로 사우디에 원전 건설을 준비하자”고 했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의 원전 건설 정책 전환으로 무산되었다.

사우디 왕세자의 국빈 방문(2019년6월26일)은 한국인에게 ‘중동 붐’과 같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왕세자는 “양국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형제의 관계가 있다. 양국간 기업들이 활발한 활동을 통해 부가가치를 서로 창출할 수 있는 전략적이고도 중요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전2030’ 발표(2016년4월25일)로 사우디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활기찬 사회(A Vibrant Society), 번영하는 경제(A Thriving Economy), 진취적인 국가(An Ambitious Nation)를 내용으로 하는 3대 영역은 사우디를 새로운 국가로 변화를 목표로 한다. 여성 운전(2018년8월6일), BTS공연(2019년10월11일), 콘서트 및 영화관람 해제, 종교 경찰 권한 축소 등은 가시적인 변화이다.

왕세자가 처음 국빈 방한 기간 서울에서 개최된 Saudi Korea Partnership Convention에서 “KSFS 회장은 1970년대, 1980년대 사우디 진출 한국 근로자들이 자유롭게 사우디 방문을 하도록 해달라. 인적 교류가 가장 중요하다. 40년이 지나 한국 근로자들은 대부분 고령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가족을 데리고 과거 고생한 건설 현장을 가보도록 해 달라”고 했다. KSFS의 간곡한 요청 때문인지 사우디는 관광비자 발급을 발표(2019년9월28일)하였다.

가난했던 한국 근로자들이 “독신으로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주야로 사우디 발전을 위해 일 만한 인도주의 정신을 칭찬하며, 이들에게 항공여비 제공 등으로 사우디 관광에 특별 배려를 한다면, 국제사회는 국왕의 세계 평화와 인도주의에 감사하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근로자의 사우디 관광 배려는 사우디에 진출한 많은 아시아 근로자들에게 큰 파급 효과가 되어 획기적인 관광 유치에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왕세자 방한이후 사우디 기획재정부(MEP)는 사우디 근로자 사우디 재방문 사업인 SHCI(Saudi Home Coming Initiatives) 프로그램을 KSFS에 제안(7월21일)했다.

SHCI의 요지는 Infrastructure Development, Cultural Unveiling, Experience Nature이다. MEP는 1970,80년대 사우디 근로자 사우디 방문단을 구성, 명단을 보내 달라고 하여 1진 40명 명단을 보냈으나, 코로나 확산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MEP는 미디어 기술이 발달한 한국에서 사우디 소개 다큐 제작과 SNS로 사우디를 홍보해 달라고 했다. KSFS는 이러한 제안도 국내 미디어 제작사를 선정하여 제안서를 보냈으나, 코로나로 연기가 되고 있다.

사우디 BTS 리야드 공연으로 한국은 사우디 변화를 확인했다. KSFS는 SHCI의 일환으로 코로나가 진정세를 보이면 사우디에 많은 관광객을 보내려 한다.

중.고. 대학생과 청년층은 인류 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 통상 로” 비단길(Silk Road), 홍해 바다를 따라 내려오는 실크로드 길을 따라 Tracking 등산을 하도록 하겠다.

기업인과 종교인들은 신도시 건설 NEOM 시티 시장 조사와 구약성경에 기록된 사우디 아라비아에 관계된 지역 Midian, Dedan, Dumah, Tema 등 성지와 Alula 인근의 아름다운 사막지대, 그리고 1970년대, 1980년대 어려운 환경에서도 건강을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8시까기 사막에서 골프를 하고 출근을 한 한국 근로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사막 골프’추억 여행을 가도록 하려한다.

이제까지 Hidden Country로 알려진 사우디에 여행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사우디 관광희망 우선 순위 관광객으로 한국 인구의 절반인 연인원 2500만명이 된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우디 공식 방문(2015년3월3-4일) 이후 청소년들에게 사우디 진출을 권했다. 그러나 1970년대 부모 세대가 독일 광부와 간호사, 월남전 참전, 중동 근로자 파견 등으로 고생을 한 덕분으로 풍요롭게 자란 청소년들의 반응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을 ‘중동 개그’ 라 하며 SNS를 뜨겁게 달궜다.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 그러나 청년들은 16년래 최악의 청년 실업률 해결책이 고작 ‘중동에 가라’ 라니, 자국 청년들도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치는 곳이 중동이다. 약속의 땅은 없다. ‘니가 가라, (경향신문 2015년4월2일)

부모세대는 자식들이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도록 키우고 싶어한다.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고생을 모르고 자란다. 세대간 갈등이 없기를 바란다.

‘한인 사우디 진출 사’가 어린이와 MZ세대에 부모 세대의 고생을 알고, 열사의 사막 땅에서 오직 희망을 안고 어려움을 견딘 “한국 근로자들의 오기, 패기, 끈기 정신” 재무장으로 한국과 사우디가 도약하는데 기회가 되길 바라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3면이 바다와 북쪽은 대륙과 연결이 되어 전쟁이 많았다. 삼국시대 신라가 나-당 연합(648년)으로 패망한 백제와 고구려 백성들은 바다를 이용해 많이 동남아시아와 주로 인근 나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양반 가문은 대부분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왕정국가로 살면서 특히 고려, 조선시대에 백성의 40%가 노비였다. 일제 시대 36년간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인원도 많다. 스탈린의 한국인 강제이주로 연해주에 살던 18만명이 중앙아시아에 갔고, 일본으로 징용을 당한 한국인도 113만-145만명(국회 자료)이나 된다. 한국 전쟁과 월남 파병으로 가족이 헤어진 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아픔이 한국인에게 고향에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화를 주었고, 많은 기업인의 해외진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KSFS 운영에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제다, 담맘 한인 회장들의 도움이 많았다. 모두가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월남전과 사우디에서 30년 이상 체류한 분들이라 사우디에 애정을 가지고 계시면서, 한국과 사우디간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리고 세계한인 무역협회(OKTA) 와 세계 한인 총연합회와 교류로 교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고인이 되신 우석근, 권영재 리야드 회장님과 박남천 제다 회장님, 사우디에 채소 농사로 성공한 녹색혁명의 선구자 김용복 영동농장 회장님 등이 한국인의 사우디 진출사에 큰 획을 그으신 애국자로 존경한다.

“아빠가 떠나신 지 사계절이 갔는데 낯선 곳 타국에서 얼마나 땀 흘리세요 오늘도 보고파서 가족사진 옆에 놓고 철이 공부시키면서 당신만을 그립니다….” 1979년 중동근로자 가족들을 울린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 노래이다.

 

 

■ 2022년 한국-사우디 수교 60주년 기념 포럼 개최

 

​2014년 서울에서 열린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사진=(사)한국-사우디친선협회 제공]​
2014년  Korea Saudi Business Opportunity Forum [사진=(사)한국-사우디친선협회 제공]​

 

 

2022년 4월 달은 라마단의 달이다. 20대 한국 대통령 당선인은 정치입문 8개월만에 대통령이 된 분이다. 당선인은 5월 10일 취임을 앞두고 4월1일 주한 GCC(걸프협력회의) 국가 대사단을 만났다. 당선인은 “우리나라와 GCC 국가들 간 에너지 및 건설·인프라 분야를 중심으로 상호 호혜적 협력관계를 구축해온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또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GCC 국가간 에너지 분야의 공고한 유대를 든든하게 생각한다”. “취임하면 GCC 국가들과 신재생에너지, 국방·방산, 농업, 보건·의료,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협력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GCC 국가들은 우리나라 중동 외교의 핵심이고 새 정부에서도 GCC와의 협력 확대를 외교 정책의 주요 아젠다(Agenda)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윤 당선인은 이날 GCC 대사들에게 “앗살람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이라고 인사를 건네며 “1970년대부터 우리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해서 한국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했고, 저도 청년 시절 주변 친구들이 취업하고 또 기업이 성장함으로 해서 중동 진출에 많은 혜택을 본 세대에 속한다”고 말했다.

올해 2022년은 사우디와 수교 60주년이다. KSFS는 리야드에서 수교 기념 포럼을 개최하고자 한다. 포럼 주제는 대통령 당선인이 GCC 대사단을 만나 협력 확대를 강조한 국방. 방산, 농업, 보건. 의료, 교육, 문화 분야와 왕세자 방한이후 MEP가 제안한 SHCI프로그램을 주제로 하려고 한다

2차 사우디 포럼도 1차 포럼처럼 KSFS가 현지 대사관의 협조와 사우디 협력 부처 상공부(MCI)와 상공 회의소(CSC) 및 MEP, MISA, MOC, MOT, MOS, 에너지 부처 등 KSFS가 협력을 받는 부처 전문가 참여 포럼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72년전 우리가 경험한 3년간 한국 전쟁을 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둘째 형님이 참전, 전사하여 국립묘지에 계신다. 북한은 미국까지 도달하는 ICBM을 개발하여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국토의 90%가 사막인 사우디 사막에서 북한을 응징할 무기개발을 민간단체 주도로 도와준다면, 외교적 마찰이 없는 국가 안보도 가능하다. 한국에서 또다른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래를 대비하여 우리는 해외 진출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간 세계는 온대 지대를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였으나, 이제는 전기시설 에어컨 개발로 날씨가 더워서 진출하지 못한 사막 땅과 미개척지 아프리카 진출이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기회의 땅이다.

6세기 전후 아라비아 상인들의 한반도 진출, 8세기 Talas전투(751년)에서 한민족 포로들이 이슬람 국가에 살게 되었고, 13세기 원나라의 중앙아시아 색목인 100만명 관리 채용, 20세기 한국 전쟁이후 “중동 붐”에 근로자 500만명 진출 등 양국은 형제적 교류가 있었다.

21세기에는 작은 국토를 가진 한국이 사우디보다 경제규모가 2배나 크다. 이제는 우리가 사우디를 도와야 한다. 20세기는 사우디가 우리에 희망을 준 나라이다.

한국 전쟁 경험 세대와 전후 세대가 함께 사는 지금의 한국은 인구비례로 보아 전후 세대가 많다. 후손들이 전쟁을 모르고 살도록 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많은 분들이 사우디가 한국의 안보와 경제, 문화 미래 성장에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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