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제일'·신경영 철학으로 글로벌 삼성 토대 마련
2만3000여 점 기증으로 K컬처 위상 높인 문화 후원가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남긴 산업·경영·문화 분야의 유산이 서거 6주기를 맞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선대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혁신 경영으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으며, 문화유산 보존과 예술 후원에도 평생 헌신하며 국가 경쟁력과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 선대회장의 가장 큰 업적은 반도체 산업 육성이다. 그는 1974년 자금난에 빠진 한국반도체에 개인 자금을 투자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은 핵심 부품을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고, 세계 반도체 업계 역시 오일쇼크 여파로 침체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은 대한민국이 선진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첨단산업 육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결단은 1983년 삼성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로 이어졌다. 삼성은 같은 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고, 이후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달성이라는 성과를 거두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특히 불황기에도 투자를 멈추지 않는 선행 투자 전략은 기술력과 생산능력에서 경쟁사와 격차를 벌리는 '초격차' 경영의 기반이 됐다.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뿐 아니라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로봇 등 미래 산업의 성장 가능성도 일찌감치 내다봤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산업 간 융합과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했으며, 전자기술과 소프트웨어가 제조업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창의성이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될 것이라는 통찰도 제시했다. 오늘날 생성형 AI와 AI 데이터센터,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의 부상은 당시 그의 미래 예측을 다시 조명하게 만들고 있다.
인재 육성에 대한 철학도 이 선대회장의 대표적인 경영 유산으로 꼽힌다. 그는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론 아래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 확보와 육성에 힘썼다. 1990년 도입된 지역전문가 제도는 해외 현지 경험을 통해 글로벌 감각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인재 양성을 단순한 기업 투자가 아닌 국가의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로 인식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표한 '신경영 선언' 역시 삼성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상징되는 신경영은 양적 성장 중심의 경영에서 품질과 혁신 중심의 경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7·4제 도입, 라인스톱제 시행, 500억 원 규모 불량 휴대전화 화형식 등 강도 높은 혁신 활동은 삼성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이어지고 있다. 이 선대회장은 평생에 걸쳐 문화재와 미술품을 수집하며 문화유산 보존에 힘썼고, 유족들은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2만3000여 점의 문화재와 미술품을 기증했다. 기증품에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비롯해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의 작품과 모네, 피카소 등 세계적 예술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이른바 'KH컬렉션'은 국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국가 문화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전국 순회전 누적 관람객은 350만 명을 넘어섰으며, 단일 컬렉션 기준 국내 최대 흥행 기록을 세웠다. 최근에는 미국 워싱턴, 시카고, 영국 런던 등 해외 주요 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리며 한국 미술과 문화유산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 선대회장이 남긴 도전과 혁신의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반도체 경쟁력과 문화 강국의 기반이 됐다고 평가한다. 반세기 전 시작된 그의 과감한 선택과 장기적 안목은 AI 시대를 맞은 현재에도 한국 산업과 문화의 중요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